라블랑스에서 티벳탄들과 코라를 돌다


 


란조우에서 샤허로 이동

 

8시 30분쯤 란조우 남부 터미널에 도착해서 샤허행 티켓 대신 인근의 진샤행 버스표를 구하려고 했으나 이 역시도 실패.
외국인들에게는 여권 및 비자 복사본 등을 요구하며 꽤나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기에 샤허행 뿐만 아니라
진샤행 버스티켓 구매도 불발에 그침.

-2008년 3월에 발발한 티벳 사태와 베이징 올림픽게임 등의 여파로 이 지역은 외국인의 출입이 전혀 허용되지 않다가 
  2009년 6월 28일 경에야 비로소 외국인의 출입이 허용되긴 했지만 여전히 버스터미널 측에서는 이에 대한 통보를 받지 못한 탓인지
 외국인들에게 일체의 티켓도 판매하지 않고 있었다.
 일단, 샤허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도시 진샤를 경유해서 들어갈 요량으로 느긋한 시간에 남부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진샤행 버스티켓 구입도 갖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있었다.

진샤행 버스티켓을 끊기 위해 한참 분주하게 설치고 있는데, 나처럼 샤허행 티켓을 끊기 위해 동부서주하고 있는 미국인을 만났다.
하이난 대학에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7주동안 중국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는 어젯밤에도 자신이 예약한 샤허의 호텔에 전화를 걸어 외국인의 입경이 가능하고
몇 명의 서양인 여행자들이 투숙하고 있다는 애기까지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왜 이런 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한참이나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터미널 측에서 서류 등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을 보면 꽤나 그 절차가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비싸긴 하지만 비용을 나누면 아무래도 부담도 적을 것 같아 함께 택시를 타고 샤허로 이동하게 되었다.



500위안+50위안(고속도로 통행비)

진샤까지 이동하는데 란조우에서 출발한 기사가 진샤에서 다른 택시를 타고 갈 것을 요구.(300위안)
진샤에서 샤허까지 다시 택시로 이동(200위안)했으나 수시로 나온다는 검문소는 전혀 보이지 않음.

화교빈관 307호에 방을 잡음
(야징-보증금 190위안, 165위안*2일=330위안)

라블랑스 투어
중국인 단체 여행자들을 인솔하는 중국어 가이드를 따라 라브랑스 경내 투어
무슨 말인지 몰라 뒤만 따라다니며 번외 사진만 찍음.
투어 이후, 혼자 코라를 천천히 돌면서 많은 티벳탄을 만남. 

 

저녁식사
노마드(티벳탄) 식당

-       모모(의외로 양 노린내가 많이 나서 몇 개 먹고 그대로 남김)
-       스윗 앤 샤워 치킨(닭으로 만든 탕수육, 닭의 육질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두터운 튀김옷에 좌절)
-       창(티벳의 전통주) - 진한 뒷맛이 끝내 줌. 


        - 여행 노트 중에서...







진샤臨夏를 지나 샤허夏河로 들어서자 구름은 더욱 낮게 깔려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에선 금새 소나기라도 퍼부을 것 같은 기세로 의기양양했지만 마른 길은 희뿌연 먼지만 잔뜩 일으켰다
란조우에선 반팔에 반바지, 샌들만 신고도 더워서 어쩔 줄 몰랐는데 서늘한 고원지대인 샤허의 기온은 스산하다 못해 춥기까지 했다.
배낭에서 얇은 여름 잠바를 꺼내 입었지만 여전히 냉냉한 기온은 몸을 싸늘하게 휘감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렇게 샤허에 도착하긴 했지만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처럼 온전히 메말라 버린 느낌이었다.

라블랑스拉卜楞寺 입구에 위치해 있는 화교빈관, 그 빈관의 307호가 이틀동안 내가 머물 나만의 작은 공간이었다.
배낭을 풀어 제법 두툼한 옷가지를 꺼내 입고는 양말도 꺼내 신었다.
불현듯 찾아온 한기 때문인지 택시 안에서부터 내내 몸을 떨었던 탓에 감기 기운이 서늘하게 돌고 있었다.
아이팟을 외부 스피커에 연결한 뒤 음악을 틀고는 볼륨을 키웠고 얼마 남지 않은 생수를 커피 포트에 부어 스위치를 눌렸다.
몇 봉 남지 않은 인스턴트 봉지 커피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한국에서라면 마시지 않을 설탕과 프림이 혼합된 인스턴트 커피를 잔에 쏟아붓고는 막 달궈진 뜨거운 물을 넣어 저어 주었다.
건조하던 방 안이 금새 사람의 온기로 따뜻하게 데워졌고 달달한 커피맛이 기분좋게 입 안에 번져갔다.


커튼을 재치고 창문을 열자, 샤허의 커다란 대로가 한 눈에 들어왔고 드문드문 티벳탄들의 모습도 보였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저타르의 담배 한 개피, 달콤한 음악이 있는 내 작은 공간에 티벳인들의 작은 마을이 그렇게 다가왔다.
낮게 드리운 구름은 이내 한바탕 퍼부울 것 같이 을씨년스러웠고 차가한 바람은 얼굴에 부딪혀
그렇지 않아도 훌쩍이는 감기증세를 더욱 악화시켰지만 몽롱함 속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은 은근히 자극적이었다.
나도 너도 아닌 3인칭의 관찰자가 되어 바라보는 세상의 낯선 풍경...
거리를 따라 늘어선 가게들과 코라(순례길)를 돈 뒤 집으로 돌아가는 두 갈래로 머리카락를 땋은 티벳 할머니의 쓸쓸한 뒷모습과
요란한 치장으로 버릇없이 떠들어대는 중국인 관광객들과 손님을 기다리는 낡은 오토바이 택시 기사의 모습까지...
마치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는 듯 세세한 그들의 일상적인 동작이며 행동이 머릿속으로 입력이 되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던 '혁명의 땅'이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코라를 따라 길게 늘어선 커다란 마니차.
순례자들은 쉼없이 '옴메니 밧메홈'을 읊조리며 마니차를 돌렸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그 순례길의 대열에
나도 끼여 마침내 그들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라블랑스가 빤히 보이는 그 길에서
스님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오체투지를 했다.
그 앞을 가로 질러 가는 풍선장수의 빨간 풍선과
스님이 입고 있는 빨간가사와 잘 맞아떨어졌다.
낮게 드리운 구름과는 사뭇 상반되는 느낌의 화려한 색깔...










짙은 구름이 금새라도 뚝 떨어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큼 가깝게 내려앉아 있었다.
코라를 도는 부부에겐 날씨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나를 흘낏 쳐다보며 지나쳤어도,
그것 또한 안중에 없는 듯 했다.
마치 구름에 달 가듯이 코라를 돌고 있는 티벳탄 부부...


 




코라를 돌다 잠시 휴식을 취히고 있는 여인들을 만났다.
낯선 이방인에게 기꺼이 그들의 자리를 양보하고
낯선 이방인의 요구에 기꺼이 포즈까지 취해주는 그녀들이 너무 고마웠다.







끊임없이 작은 사원 안을 돌고 있는 한 티벳탄
할머니.
그녀의 뒤를 수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사원 안을 돌고 또 돌았다.






라블랑스 주변의 집들은 대부분 라마스님들의 거처라고 했다.
어느 거처 앞에 다가가면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의 독경소리가 들리기까지 했다.
그 집 앞을 한참이나 서성거리다 만난 한 라마스님의 뒷 모습...











지팡이를 짚고 코라를 돌고 있는 한 노파의 움직임을 따라
내 카메라가 함께 따라갔다.
걷기조차 버거울 것 같은 노파의 느릿한 걸음걸이...
그녀의 가슴 깊이 깔려있을 신심의 무게가 비로소 실감나기 시작했다.









빤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예쁜 티벳탄 소녀들.





























잠시동안 길동무가 되어 함께 코라를 돌았던 라마스님.
스님의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이렇게라도 찍어야 했다.
코라를 돌다 어느 사원 안에 들러 잠시 기도를 드리고 나오는 스님.
스님은 사진을 찍으며 느릿하게 걷고 있는 나와 보조를 맞추며 동행이 되었다.







모자를 계단 위에 내려놓고  사원 안에 안치된 부처님께 경배를 드리려는 노파.






























































 

 

 

 



2008년 3월 10일, 베이징 올림픽을 불과 5개월을 남겨둔 시점에서 라싸에서 티벳인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600명의 티벳승려들이 1959년 일어났던 티벳독립운동 49주년을 기념하고 이에 대한 항의 표시로 발발하게 된 것이다.
라싸에서 비롯된 봉기는 달라이라마가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 뿐만 아니라, 티벳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네팔의 카트만두 등에서도 불같이 번졌고,
중국 내에서도 아바 간난 장족자치구를 비롯한 여러 티벳인 거주 도시까지 봉기가 이어졌다.
중국 정부는 공안(경찰)을 투입해 봉기를 저지하려 했지만 오히려 티벳인들의 분노만 야기시켰다.
티벳의 경제를 위협하는 한족들의 상점이며 은행들을 차례로 습격해서 불태우고 부수게 되자 위기를 느낀 중국정부는
마침내 군대를 동원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시위가 누그러 들지 않자 마침내 중국군은 무력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수십명의 티벳인들이 살해되기에 이른다.
샤허는 아바, 간난 장족자치구 중에서도 시위가 가장 강렬하게 일어났던 지역으로 수많은 티벳인들이 다치고 투옥되었다고 한다.

카메라 가방을 둘러매고 바람부는 거리로 나섰다.
라블랑스 경내를 투어로라도 한 바퀴 돌아볼 작정이었다.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골목을 지나면 작은 광장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라블랑스 투어의 시발점.
영어로 된 가이드가 없냐고 묻자 퉁명스럽게 '메이요(없다)'라고 답하던 라마승은 어디론가 손을 가리키며 '콰이(빨리)'를 외쳤다.
그곳엔 한 무리의 중국인 여행자들이 가이드인듯 한 라마승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아마도 빨리 합류하라는 뜻 같았다.


예정에도 없던 중국인 단체 여행자들 틈에 끼여서 돌게 된 라블랑스 경내 투어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중국어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니 어떤 감흥도 느낌도 받을 수 없는데다 워낙 이런 식의 여행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보는 모든 것이 형식적이고 건성일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사진도 찍긴 했지만 중국인 단체 여행자들의 주변만 배회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투어를 왜 신청했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라블랑스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코라를 돌면서 티벳인들도 만나고 사진도 찍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하릴없이 중국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나의 우둔함이 못내 부끄러워 이내 대열에서 이탈했다.


티벳인들처럼 일일히 마니차라 불리는 경통을 돌리지도 않았고 머리를 숙여 조신하게 기도를 올리지도 않았지만
느린 걸음으로 그렇게 코라를 돌았다.
눈빛이라도 마주치는 되는 티벳인들에게 따뜻한 말투로 건내는 '따시뗄레'가 전부이긴 했어도 
아낌없이 고개를 숙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티벳인들은 내가 가진 카메라 장비에 꽤 많은 관심을 보였고, 실제로 장비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중국말이 안되니 결국 한국어와 손발짓으로 겨우겨우 대화하는 수준이긴 했지만 티벳인들은 호탕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한족같이 생긴 녀석이 '중꿔화 팅부동(중국어 몰라요)'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것도 우스운데,
렌즈 케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가방을 들고 뒤뚱거리며 다니고 있는 품도 그들에겐 꽤 신기했으리라.

경통을 돌리면서도 쉼없이 '옴메니 밧메홈'을 읊조리고 있는 티벳 할머니들의 뒤를 따르면서 그들의 신앙에 대해 감동을 받았다.
지독한 신심의 깊이까지야 감히 가늠조차 힘들겠지만, 삶이 곧 종교인 그들에게서 
과연 티벳불교란 어떤 것일까를 끊임없이 되뇌이게 했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코라를 돌고 또 돈다고 했다.
두 발로 걷는 것도 모질라서 다섯 부분의 신체를 땅에 닿게 하는 이른바 오체투지로 코라를 도는 행렬도 곧잘 눈에 띄였다.
중생이, 빠지기 쉬운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불교의 예법 중 하나로 스스로를 낮추고 불,법, 승의 삼보三寶에게
존경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라고 백과사전에서는 설명하고 있었지만 사실 보기 전까지는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는 공허한 설명에 불과했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더니,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심장의 박동소리가 빨라지며 호흡이 가파왔다.

그들의 가혹하고도 진실한 삶이 이렇게도 절실하게 내 심장을 후벼파고 들어올 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일순, 마음이 무거워졌고 뭉클한 감동처럼 우러난 경외감이 그들에게로 한없이 향하고 있었다.

안락하고 편안한 내 삶에 대해 끊임없이 자해를 가하려던 철없는 사념들이 초라하게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내게 있어서 여행은 언제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다.


<글 & 사진 : 푸른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