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무스 가는 길에 만난 티벳 유목민 여자들
밤늦은 시간, 똑똑거리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7시에 출발하는 랑무스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오지 않는 잠을 재촉하며 막 선잠에 빠져 들고 있었는데...
'Who are you?'라며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문쪽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지르고는 뻣뻣하게 굳은 긴장을 풀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속옷차림으로 문을 열었더니 란조우에서 이곳 샤허까지 함께 택시를 타고 온 미국인 에디와 화교빈관의 남자 매니저가 서 있었다.
'잠을 깨워 미안하다'며 먼저 사과를 건낸 중년의 미국인 에디는 밤늦게 노크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기도 내일 아침에 샤허를 떠나 랑무스로 갈 예정인데 마침 영어가 가능한 중국여자를 만나서 동행이 되기로 했다고 한다.
중국여자의 애기로는 버스를 이용해서 한 번에 랑무스로 가는 것보다는 돈을 나눠 택시를 대절하고,
이동하면서 경치가 좋은 곳이 나오면 차를 세워 풍경도 보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고 하니 함께 가지 않겠냐고 선뜻 물어왔다.
이미 45위안짜리 버스표를 구매하긴 했지만 왠지 그의 제안에 구미가 당겼다.
거기다 함께 온 화교빈관의 매니저는 버스표를 다시 돈으로 환불해줄 수 있다고 하니 사진찍는 내 입장에서는 그보다 좋은 제안이 어딨겠는가.
샤허에서 랑무스로 가는 초원길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버스로 이동할 경우엔 사진찍기가 거의 불가능한 게 사실이었다.
택시는 새로 뚫린 고속도를 이용하지 않고 조금 불편하긴 하겠지만 구도로를 이용해서 이동할 예정이기 때문에
인근 티벳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꾸물꾸물 가슴 밑바닥에서 들끓었다.
물론 금액적으로 조금 비싼 건 사실이지만 여러가지를 추산해 봤을 때 택시를 쉐어해서 이동하는 게 훨씬 이득일 것 같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에디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매니저에는 낮에 산 버스 티켓을 건냈다.
그렇게 미국인 에디와 중국 처녀 샤칭(夏靑)과 함께 길동무가 되었다.
비록 에디와는 란조우에서 샤허까지 함께 오기는 했지만 샤허에서는 거의 따로 움직였기 때문에 얼굴정도 아는 사이 수준이었고,
새침한 텐진 아가씨 샤칭과는 첫만남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어색하고 불편하고 서먹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막 샤허를 빠져나오는데 도로를 따라 이동하는 한 무더기의 야크떼들이 길을 막아섰다.
경적이 울리면 화들짝 놀라서 뭉특하게 튀어나온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달아나기 바쁜 양들과는 달리 야크들은 느긋했다.
에디가 카메라를 꺼내서 연신 셔터를 누르자 티벳인 운전사는 차를 길가로 세우고는 중국어로 사진을 찍으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낮은 구름으로 하늘은 어둡게 내려앉았지만 가끔씩 길을 막는 가축들의 이동은 사진의 좋은 소재였고 우리는 물 만난 고기마냥 사진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시원한 웃음이 매력적인 티벳인 운전사는 우리가 요구하는 풍광 좋은 지점에 어김없이 차를 세웠다.
어젯밤 에디가 한 말대로 택시는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빗겨나서 물웅덩이가 잔뜩 고인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접어들었다.
갖가지 색깔의 키낮은 들꽃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초원이 나타났고 신선한 풀을 따라 이동하는 티벳인 노마드들의 텐트가 점처럼 흩어져 있었다.
드넓은 초원엔 양과 야크와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치 몽골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히 이런 드넓은 초원풍경은 몽골에서만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낯선 동티벳 땅에서 재회하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어떻게 보면 몽골과 티벳 사이에 오랜기간 연결되어 온 역사의 고리 부분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이 부분에 대한 이해는 한국에 돌아가서 조금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지만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닮은 꼴들은 흥미를 유발시켰다.
이쪽이 깐쑤성(甘肅省 감숙성) 랑무스 올라가는 길
저 문에서 입장료를 내고 올라오면 된다.
반대편은 쓰촨성(四川省 사천성) 랑무스쪽이다.
샤허의 라블랑스가 파고들 빈틈 하나 없이 잘 정돈된 느낌이라면 랑무스는 사람 냄새가 진득하게 풍겨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랑무스에 대한 첫 인상은 나름대로 호의적이었다.
비싼 숙소들도 꽤 많지만 그보다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숙소가 더 많았고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식당들도 꽤 배려있게 보였다.
숫자적인 면에서 절대적으로 중국인 배낭여행자가 많은 이곳은 마치 중국인 배낭족들의 성지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몽골인들이 유례없이 대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 시대, 당시 토번이라고 불리던 티벳도 몽골의 대제국에 편입되었다.
이때부터 몽골인들은 진지하게 티벳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티벳과 몽골의 연결고리는 그때부터 형성되었다.
겔룩파의 수장이며 티벳의 정신적인 지주인 '달라이 라마'라는 말도 큰바다라는 몽골어의 '달라이'와
영적스승을 의미하는 티벳어의 '라마'의 합성어로 '바다처럼 넓고 큰 덕을 갖춘 스승'이라는 뜻이다.
3대 달라이라마인 소남가쵸(1543-1588)는 1578년 몽골황제인 알탄 칸을 교화시키고 몽골 전역을 티벳불교화시켰다.
당시 유라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이었기 때문에 티벳불교와 달라이라마가 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야외에서 펼쳐지는 법회 자리라는 의미의 '야단법석野壇法席'도 한국어에서는 '아주 시끄럽고 부산스럽게 군다'라는 뜻으로 변형돼서 사용하고 있는데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고려말 무렵, 라마불교의 야단법석이 그야말로 시끄럽고 요란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실제로 티벳불교의 법회를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치 무당집을 연상하듯 다양한 악기와 주문 등으로 요란했었다.
4대 달라이라마였던 용텐가쵸(1589-1617)는 티벳인이 아닌 몽골인이었다.
3대 달라이라마인 소남가쵸가 몽골의 황제 알탄 칸에게 입적하면서 몽골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때 환생한 사람이 바로 용텐가쵸였다.
그는 알탄 칸의 직계 후손으로 이때부터 몽골과 티벳의 정신적인 유대관계는 더욱 밀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대 달라이라마인 나왕롭상 가쵸 시대(1618-1682)에 몽골의 황제는 구쉬 칸이었는데,
구쉬칸은 달라이라마에게 티벳의 정치적 종교적인 통치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수세기동안 지방으로 분권되어 있던 티벳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달라이라마는 1642년 티벳의 군주 자리에 등극했고 오늘날 티벳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포탈라궁을 완성했다.
한마디로 달라이라마가 티벳 권력의 중심부에 굳건하게 설 수 있는 기틀을 만든 것이며,
이는 지금의 달라이라마인 14대 텐진가쵸까지 이어져 오게 한 구심점이었다.
비록 라싸가 있는 티벳지역은 아니지만 깐수, 칭해, 스촨 등에 흩어져 사는 티벳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도 충분히 새로웠다.
이제 라싸는 티벳다운 모습은 거의 자취를 감췄고 지극히 중국에 동화된 어설픈 중국의 일개 도시를 바라보는 느낌인 반면에
이곳은 티벳 본래의 제대로 보존되고 이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중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옛 티벳의 암도지방인 이곳을 시짱지역(현재 티벳)에서 떼어내 깐수, 칭해, 스촨성으로 강제 편입시키고 말았다.
달라이라마의 고향인 암도지방을 영원히 중국의 속령으로 남겨둠으로써 독립의 싹조차도 없애겠다는 중국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탓일까.
칭하이성의 성도인 시닝西寧은 티벳의 암도지방의 중심도시였는데, 현재도 티벳인들은 시닝 대신 '스랑'이라는 자기식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은 평화로웠다.
티벳의 현실은 비록 참담하고 어두웠지만 낮은 하늘 아래 빛나는 초원의 들꽃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간헐적으로 빗줄기가 긋기도 했지만 비 내리는 초원은 색다른 맛이었다.
오랫동안 서 있으면 시간마저도 초월한 그 풍경 속으로 그대로 녹아들고 말 것 같은 찬란한 희망이 싹텄다.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도착하긴 했지만 즐거운 여행길이다 보니 서먹하던 길동무들과는 어느새 꽤 친숙해져 있었다.
다소 비싼 가격인 138위안(한화 28,000원 정도)짜리 호텔에 방을 잡고 카메라 가방만 챙겨들고는 바깥으로 나섰다.
키다리 회족 아저씨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와 식사를 즐기고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적어놓은 포스트를 훓어보기도 하고, 에디와 샤칭과 잡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여유롭게 밥을 먹은 터라 속도 든든했고 여유로워서 그런지 나즈막한 산자락에 위치한 랑무스가 친근하게 다가왔다.
확실하게 샤허의 랑블랑스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오늘 오를 곳은 깐수성 랑무스 쪽.
물동이를 들고 가는 아이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그 길을 오르고 있었고,
우리도 산책하듯 녀석의 뒤를 천천히 쫓고 있었다.
낯설게 얽힌 구름들이 왠지 스산함을 불러일으키는 곳. 랑무스...
이곳은 일반민가들보다는 스님들의 거처가 단연코 많았다.
낯선 집앞을 지나칠 때마다 독경소리가 들렸고, 골목은 가끔씩 나타나는 라마승들의 모습만 간헐적으로 보였다.
시끄러운 소리에 이끌려 찾아갔더니 의외로 한 무리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릴 때부터 출가한 아이들은 라마승이 되기 위해서 스님들의 거처에서 묵는다고 옆에 있던 샤칭이 번역을 해줬다.
녀석들은 이 근처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긷기 위해 올라왔다가 동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등을 돌리며 거부의 뜻을 확실히 했다.
무릇 아이들이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법인데,
중국인 관광객들의 거친 카메라 세례에 꽤나 혹사당했던 아이들은 먼저 거절의 뜻부터 내비쳤다.
스님에게 야단맞는 자신의 동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
카메라를 거절하던 아이들을 카메라 앞에 모이게 한 건 당연히 포토 프린터 덕분이었다.
그렇게 사진 한 장 찍고 싶다고 조를 때는 태연하게 모른 척 하더니, 동무 하나가 받아든 사진 한 장에 녀석들의 마음은 180도로 급전향하고 말았다.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녀석들은 아낌없이 웃음을 남발했고, 나와 눈빛을 맞추기 위해 애써는 녀석들을 볼 때면 풋하며 웃음이 났다.
순수한 정신을 가진 녀석들이라지만,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에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녀석들과의 시간은 더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광각렌즈로 찍은 녀석들의 단체 사진.
나름대로 죽도 한 자루씩은 앞에 찬 녀석들의 위용있는 포즈가 일품이다.
"아저씨 이렇게 가까이서 찍어도 우리가 나오는 건가요?"
잔뜩 호기심에 끌린 빨간옷을 입은 녀석이 문득 그렇게 물어올 것만 같았다.
'따시뗄레 랑무스'
낯선 이방인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노승과 아이들.
짙게 깔린 어두운 구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코라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에게 삶은 곧 신앙이요, 믿음이었으면 삶의 전부처럼 보였다.
화려한 문양의 티벳불교의 사찰.
중국여자 샤칭도 그 화려함에 넋을 잃었는지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녀와 함께 한 랑무스여행은 그야말로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한.중.미...3개국의 낯선 여행자들이 의기투합하여 함께 했던 랑무스여행.
미소가 아름다운 티벳소녀 스자시소.
갓 17살의 이 소녀는 엄마와 함께 쉼없이 코라를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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