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을 담기 위해 다시 석두성으로 향했다.
잠시동안의 휴식과 늦은 식사, 그럼에도 몸은 여전히 힘들고 피곤했다.
쿤자랍 패스에서 가졌던 고산증의 미미한 여파가 여전히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가 싶었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중국의 표준 시간대보다도 2시간이나 늦은 이곳은 서역의 끝자락에 위치한 타쉬쿠르간,
베이징 시간으로 저녁 10시가 넘어서야지 겨우 일몰빛을 볼 수 있는 곳이니 하루해는 그야말로 지리할만큼 길었다.
꼭두새벽부터 깨어나 사진찍고 이동하는 일이 이젠 당연한 여행의 일상이 되어버리긴 했어도
적응하지 못한 육체는 혹독한 후유증을 양산시키고 있었다.
몸의 근육은 뻐근하게 굳어 있는데다 눈두덩이는 무겁게 부어올랐고 겉잡을 수 밀려오는 피로 때문에 이동 내내 잠에 빠져들어야 했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여행이고 사진이다 보니 이런 고통을 토로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에 겨운 변명 쯤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꽤나 심각했었다.
증상은 얼굴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눈두덩이가 붓는 문제 뿐만 아니라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서 트고 갈라지는데다
급기야 얼굴의 각질까지 허옇게 벗겨지고 있었다.
자외선이 강하고 건조한 지역이라서 곧잘 선블락 크림을 바르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삭아들어가는 피부는 어찌 해 볼 방도가 없었다.
하긴 여행의 초반에는 어디에서든 꼭 이랬던 것 같다.
피부관리 쯤은 여자의 전유물이라고 믿고 있는 어리석은 선입견 탓에 강한 햇살에서도 모자는 커녕 선글라스조차 끼지 않을 때가 많았다.
거기에다 물이 맞지 않아 생기는 물앓이로 인해 초반 며칠은 혹심한 설사병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그 증세가 이번에는 얼굴까지 침투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이런 저런 이유로 그렇지 않아도 많은 장비로 인해 무겁던 걸음걸이는 더욱 무거워졌고
화끈거리며 달아오른 얼굴 때문에 힘에 부대낄 정도로 버거웠다.
차가 별로 없는 타쉬쿠르간 시내의 가로수길을 쭉욱 따라가다 보면
석두성 아래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낮은 흙담과 제법 위용을 뽐내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조화를 이루는 그런 작은 마을...
귀가하는 가족을 따라 울퉁불퉁한 마을의 입구로 들어선다.
석두성이 놓여있는 작은 언덕에 위치한 마을.
허름하게 다닥다닥 붙은 돌담벽 웬지 황폐함을 조장하기는 하지만,
극심한 겨울추위에 최적화된 가옥구조를 지녔다.
주로 유목생활을 하는 타지크인들은 여름철엔 초원을 떠돌며 유목생활을 하지만
겨울을 쐬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길게 드리운 그림자 두 개.
낯선 이방인의 출현에도 아랑곳 않고 어디론가 갈 길을 재촉하는 타지크 남자.
오랫동안 그곳에 멈처 서서는 빛을 관찰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우린 작은 인사말만 건낼 뿐이었다.
'약시스무시스'
사람들이 모여앉아 두런두런 애기를 나누는 그곳에도 빛이 쏟아졌다.
낯게 드러누운 빛은 흙담벽을 비집고 또아리를 틀 듯 방향을 돌려서는 그들에게 서광처럼 쏟아졌다.
마을을 지나면 금새 초원이 나타났다.
조금 전 빨래를 끝낸 아낙 둘이가 무거운 빨랫통을 들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거운 듯이 보여서 '들어줄까요?'라며 의사를 표시했더니 손을 내저으면 환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들의 뒷모습에도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그 따뜻한 기억 속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오히려 가볍게 보였다.
초원과 마을을 따라 길게 형성된 아스팔트 길 위에서는 아이들이 한참 놀이에 열중해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니 규칙도 꼭 우리들의 그것과 유사했다.
시대를 거슬러 서로 끈끈하게 이어지던 문화의 연결고리가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났다.
말을 타고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던 사내들을 또다른 사내가 불렀다.
고삐를 젖히자 말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푸더덕거렸고 이내 달리기를 고개를 젖혔다.
이번 여행에선 두 대의 카메라(DSLR)를 가지고 갔었다.
광각전용으로만 사용했던 5D와 표준과 망원전용으로 사용했던 450D가 그것이었다.
1.6:1의 크롭바디(450D)에 100-400mm렌즈를 끼울 경우 최대 망원은 640mm를 확보하는 셈이니
시선에 들어오는 왠만한 풍경은 다 담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덩달아 확보한 셈이었다.
거기다 인물전용렌즈라고 일컫는 85mm f1.2와 50mm f1.8까지 구비했으니 이제 못찍을 사진은 없었다.
하지만, 강렬한 역광 아래에서는 어떤 좋은 렌즈나 카메라도 무용지물이었다.
필터를 빼고 촬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산란광에 의한 고스트현상이 발생한 것은 물론이고,
버벅거리는 오토 포커싱 때문에 원하는 장면마저 쉽게 담을 수 없었다.
게다가, 몇 걸음 더 다가가면 금새 자세를 바꿔버리는 아이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두 대의 카메라를 수시로 바꿔가면서 몇 개의 장면을 담았다.
광각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나 배경을 함께 담았다면,망원렌즈가 장착된 카메라로는 사람의 표정이나 압축된 그곳의 느낌을 담으려고 했다.
어느새 작은 마을에도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어둠이 켜켜히 쌓여가는 그 땅 위에 작은 노을이 번졌다.
서쪽에 깔린 짙은 구름층 때문에 노을은 이내 제 색깔을 드러내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지만,
긴 가로수 길 위로 묘한 흔적을 뿌려놓았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행진곡 풍의 노래소리가 왠지 발걸음을 재촉하는 듯한 묘한 여운을 남겼다.
'매의 마을'이라고 불리우는 타쉬쿠르간.
그 중심지에는 저렇게 매를 기리는 동상을 세워놓고 있다.
차가 거의 없는 동네인데다 저녁이라 그런지 타쉬쿠르간의 도로는 그야말로 한적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손으로 담은 타쉬쿠르간의 저녁 풍경.
베이징 표준시간으로 9시(이곳 시간으로는 새벽 7시)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라코람 하이웨이에는 등교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몇 km나 되는 길을 걸어서 등교하는 아이들.
끝없는 행렬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타쉬쿠르간을 조금만 벗어났을 뿐인데도 어느새 무스타크봉이 한 눈에 들어오는 초원에 들어섰다.
초록으로 가득한 벌판엔 어느새 생명의 물결로 넘실거렸다.
하늘은 더 없이 맑고 푸르렀으며 그 속을 부유하는 양떼같은 구름들.
구름들이 만들어내는 도특한 형상이 나무 한포기없는 황량한 산 위로 모자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곳에 서면 막혔던 혈관이 뚫리면서 청량함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 그 곳에 내 그림자를 넣었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그 화려한 날에...
그 광활한 곳에서...
그렇게 내가 풍경이 되었다.
끝도 없이 연결된 중국측 카라코람 하이웨이(KKH).
새벽의 지붕이라 일컫는 파미르 고원의 일부이기 때문에 의외로 평탄한 길이 많은 편이다.
사진에 대한 생각들...
저녁식사를 마쳤음에도 햇살은 여전히 강렬했다.
아침에 다녀온 석두성 아래의 작은 마을을 산책삼아 서성거렸다.
눈 부신 저녁 햇살에 긴 그림자를 누인 타지크인 마을은 고즈넉하게 웅크려 앉아 있었다.
빛이 좋은만큼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다.
좋은 사진, 아니 좋은 사진보다는 빛감이 풍부한 저녁시간대에 맞는 사진을 찍은 욕심이 앞섰다고 하는 게 옳은 말일 것이다.
빛을 찾아서 그리고 피사체인 아이의 움직임에 맞춰서 시선을 돌리고는 수많은 셔터를 눌렀다.
강렬한 사광 탓에 자동으로 설정한 렌즈가 제대로 포커스를 못 잡고 버벅거리는데다 엄청난 산란광이 CCD에 착상되었다.
아이의 어깨에 와닿는 은근한 람브란토 빛을 기대했었는데 강렬한 햇살이 내 의도와는 다른 사진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너무 안일하게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역광빛을 받으며 환하게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을 담을 때였다.
카메라를 든 낯선 이방인의 모습을 향해 아이는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포즈를 취해주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동이 잦은 여행이라는 이유 때문에 피사체의 움직임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할 때가 많을 뿐 아니라,
아름답고 광활한 풍경에 스스로 현혹당해 오히려 예전의 안타까운 우를 범하고 있다는 참담한 심경이 들었다.
지속적이고 일관적이지 못한 채 단편적인 사진들로만 도배를 하고 마는 습성화된 사진찍기의 어설픔이 못내 아쉬웠다.
극적인 움직임과 빛을 담고 또 그 빛을 제대로 버무린 내 사진을 담고 싶었는데, 여행 내내 망각하고 있었다.
다른 시선으로 보고 느끼며 그렇게 세상을 담자, 라는 그 거대한 모토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었다.
과연 사진을 찍고 있기나 한 것일까라는 형편없는 물음이 그때처럼 많이 든 적은 없었다.
셔터만 누른다고 전부 사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보고 자의적으로 해석화되지 못한 사진은 그저 단순한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면에서 내가 찍은 대부분의 사진은, 사진이라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형상화시킨 이미지였다.
내 사상은 모래 위에 세워진 반석처럼 허술했고 지식은 건기의 하천보다도 더 얕았다.
피상적이고 관념적인 생각들로 가득 채워진 내 머릿속은 그저 흘러가는 뜬구름에 지나지 않았다.
강렬한 주제의식도, 추구해야 할 지독한 신념조차 없는 내게 있어 사진은 그저 일상처럼 무미건조할 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의 주제가 아름다운 자연과 오래된 유적지가 아닌 본원적인 '인간'으로 옮겨가면서부터
내 사진의 주제도, 잘 포장시켜 애기하자면 '휴머니티'를 밑바탕에 둔 사람사진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다큐적 요소가 어느 정도 가미되어 있다고 믿고 싶지만
문제의식이라는곤 손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사진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그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여행사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셈이니 생각의 전환은 크게 일어나지 못한 것 같다.
단지 사진을 찍는 피사체가 풍경에서 사람으로 전이되었다는 차이밖에는 없다.
좀 더 현실적으로 현지인들의 삶속으로 뛰어들어서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행자가 지닌 한계를 스스로 인정해 버린 채 행동하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으니
결국 그 수준만큼의 '여행사진'밖에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많은 생각들이 그렇게 머릿속을 떠다녔다.
어느새 어스름이 타지크인의 마을에 자욱하게 깔렸다.
예측된 행동의 순간들,
고운 빛감들의 형상화,
과감하면서 파격적인 구도,
자의적으로 해석한 왜곡,
- 그 날 일기장에 올려놓았던 비장한 글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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