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롯지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출발을 서둘렀다.
오후가 되자 하늘은 더욱 짙은 회색으로 내려앉았고 거친 바람마저 불기 시작했다.
갈 길은 멀고 하루 해는 너무 짧았다.

오늘 안으로 포카라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겼지만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결코 서두른 건 아니었다. 가다가 힘들면 아무 롯지에서나 하룻밤을 지새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길 위에서 지새야 할 시간들인데 조급증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낯선 현지인들을 만나고 그들과 서투른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행의 묘미가 아니었던가.
적어도 내겐 그랬다.

다시 울레리의 그 혹독한 계단길로 이어졌다.
현기증이 아찔하게 날 정도로 계단길은 가파르고 아득해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무릎이 시큰거리면서 아파왔다.
한 동안 산을 타지 않아서 잊고 지냈던 무릎의 고통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초기라서 그런지 통증이 심하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계단 위로 채소 이파리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방금 우리를 스쳐며 오르던 중국인들의 애기가 떠올랐다.


‘올라오다 보면 채소 잎이 몇 장이 떨어져 있을 겁니다.
내려가던 어린 남매들이 떨어뜨린 것이니 줏어서 좀 전해주세요.’


채소 잎을 주워 한 달음에 뛰어 내려가자 어린 남매가 구멍난 비닐 봉지 가득 채소잎을 들고 가는 게 보였다.
구멍난 비닐 사이로는 계속해서 작은 채소잎들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남매는 그것도 모른 채 주섬주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채소잎을 떨어뜨렸지?”

내가 영어로 말하자 어느새 옆에 와있던 개다르가 눈치를 채고 네팔어로 통역을 해준다.
주운 채소잎을 비닐 봉지에 담아주려는데 다른 잎들이 또 다른 구멍으로 흘러내렸다.
난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그들의 비닐봉지를 받아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으로 감쌌다.

아이들을 앞장 세우고는 내가 비닐봉지를 들고 그들을 따라 나섰다.
그들의 집은 중턱에 놓여있는 작은 가게였다.
젊은 그들의 엄마와 아기를 보자기를 싼 젊은 새댁이 그곳에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개다르를 앞세워 흥정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당신 가족의 사진을 찍고 싶어요.
그리고, 바로 뽑아서 드릴께요. 괜찮죠?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바로 사진을 뽑아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겠는가.
그래서 찍은 그들의 단란한 가족 사진이었다.
그들의 웃는 모습이 무척 싱그럽다.
나는 이런 자연스러움이 좋다.


 

 

 

 

 

 

 

 

 

 

 

 

 

 

 

방금 울음을 멈췄는지, 아이의 눈망울엔 여전히 눈물자국이 흥건했다.
‘까꿍~’ 내가 달래주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녀석, 낯선 이방인에게 재롱이라도 피려는 걸까 제법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를 빤히 쳐다봤다.


 

 

 

 

 

 

 

 

 

땅을 갈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전혀 땅을 갈지 않을 깨끗한 복장을 하고서는 열심히 땅을 갈고 있는 여자아이가 의아해서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내려갔다.

이번에도 사진을 미끼로 타협을 할 작정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그들이 막 갈아놓은 부드러운 밭 위로 주섬주섬 몇 걸음을 내디뎠다.

옆에서 일하고 있던 남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힘겹게 갈아놓은 밭을 생각없이 생긴 이방인이 마구 밟고 지나다녔으니 누구라도 역정을 냈을 것이다.

정말 미안하다며 고개를 조아렸고 사진을 찍고싶다는 내 의견을 피력했다.

그리고, 내가 찍은 사진은 바로 뽑아줄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까지 함께 날렸다.
그렇게 찍은 여자아이의 사진이었다.…
큰 카메라가 부담스러웠는지 소녀는 꽤나 부끄러워했다.


 

 

 

 

 

 

 

 

 

“당신의 사진은 우리 집안(family)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여자아이에게 준 사진이 마음에 들었던지 조금전까지 버럭 고함을 지르며 언찮은 기색을 보이던 남자도 관심을 보였다.

거창하게 영어로 '히스토리'까지 들먹이던 남자는 자기 사진도 한 장 찍어줄 수 없냐며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조금전까지 역정을 내던 그가 이번엔 밭에서 일하는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몇 컷을 찍어서 그에게 LCD로 사진을 확인시켰고 위의 사진이 마음에 든다며 출력을 부탁했다.

궁핍한 삶이지만 함께 웃을 수 있는 여유.

지나친 사진 욕심 때문에 그들에게 민폐를 끼친 게 못내 미안하고 부끄러웠지만 이내 그들의 따뜻한 웃음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시지만 그들과 함께 웃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길에서 만난 소녀.

보자마자, 대뜸 손을 벌리며 사탕(sweet)을 달라고 했다.
외국인들이 건내는수많은 사탕으로 인해 이미 이빨이 썩어가고 있는 아이들.
솔직히 사탕 같은 것으로 유인하기 싫었지만 시간이 없는 우리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 사탕 줄 테니,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니?.

너무 속보이는 흥정이라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늘 사진 욕심에 목이 마른데다 시간마저 여유롭지 않았다.


 

 

 

 

 

 

 

 

염소와 아낙이 호기심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째 그 표정이 둘 다 비슷해서 그만 웃고 말았다.


 

 

 

 

 

 

 

 

 

뿌연 구름을 뚫은 한 줌 빛이 그 계곡 속으로 내려오고 있다.
네팔리들을 위한 서광이기를 그렇게 가슴 속으로 빌었다.


 

 

 

 

 

 

 

 

 

 

사진을 받아든 아이의 시큰둥한 표정.

미안해, 가져온 사탕이 이젠 없단다.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다음에 올 땐 꼭 챙겨줄게…
아마도, 그 다음에 이곳을 찾다보면 너도 제법 커다란 청년이 되어 있겠지.
네가 성인이 되었을 때는 네팔도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너희들의 가난…
너희들이 사탕 하나 때문에 벌리는 손…
때론 그게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단다.


 

 

 

 

 

 

 

 

 

 

어느 롯지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롯지의 안주인쯤으로 보이는 아낙이 우리 앞에 앉았다.

포터들과 네팔어로 잠시 애기를 나누었는데 오늘 안으로 나야풀까지 가는 건 힘들 것 같으니 여기서 여장을 푸는 게 어떠냐고 유혹을 했다고 한다.

'여장' 대신, 사진을 찍어 드릴께요. 웃어보세요.
하지만, 웃으라고 부탁하면 웃지 않는 게 사람의 기본적인 심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웃을 때까지 기다렸다.

포터들과 애기를 나누던 중 함박 웃음꽃을 터뜨린 그녀.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셔터를 눌렀다.


 

 

 

 

 

 

 

 

 

희안하게 밭일을 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자들이다.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들의 값싼 노동력을 팔기 위해 카트만두나 포카라 등의 대도시로 나가버린 것일까.

그렇잖아도 수많은 사람들로 들끓던 카트만두의 아산초크의 가난한 사람들이 자꾸 떠올랐다.
마치 한국의 5~60년대를 연상시킬 만큼 네팔은 가난한 나라였고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궁핍해보였다.

남자들은 돈벌이를 위해 큰 도시나 외국으로 품을 팔러 떠났고 대부분 여자들이 남자들의 빈자리를 채웠다.

 

 

 

 

 

 

 

 

 

엄마가 밭에 나가있는 동안 아이들을 보살피는 건 역시 아이들이었다.
우리들이 그랬듯이, 아직 어린 언니와 오빠들은 그보다 더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는 모양이다.

 

 

 

 



 

 

 

 

 

뭔가를 들고 하염없이 걸어오는 아낙네들…


하나같이 표정이 밝다.

무표정하게 지나치는 법이 절대로 없다.
짧지만 간단하게 ‘나마스테’라며 인사를 건내는 그들이었다.

그들과의 짧은 조우는 그래서 언제난 사람을 기분좋게 만든다.


 

 

 

 

 

 

 

 



 

어느새 좁은 계곡 사이로 어둠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갈길이 아무리 멀어도 사진은 찍어야 했다.
빨래를 걷고 있는 소녀의 슬픈 실루엣~

 

 

 





 

 

 

 

일을 끝내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볼 품 없이 초라하지만, 그래도 그들에겐 돌아갈 집이 있다.
그 안엔 따뜻한 정이 흐르는 가족들이 있을테고 화목한 웃음이 넘쳐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척박한 땅에서도 삶의 원동력이리라.

 

 

















 

제법 어둑해진 길을 따라, 힘겹게 나야풀까지 내려왔다.
짧은 트래킹은 그렇게 끝이 났다.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그리고, 소중하게 그들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짧지만 아름답고 즐거운 길 위에서의 시간들이었다.

푼힐 전망대에서 지켜봤던 그 빛나는 룽다처럼 아름다운 히말라야의 산군들.
그리고, 맑은 눈빛을 가진 아이들과 늘 손을 모아 인사를 건내던 네팔리들.
좋은 추억과 벅찬 감동만 가슴에 담아온 셈이다.

나야풀에서 포카라까지는 다시 택시를 이동했다.
잠시, 가격 때문에 택시 기사들과 흥정을 해야 했지만 그 흥정 역시도 흥미를 끌기엔 충분했다.

나의 포터였던 개다르의 속사포 같은 말투와 능숙한 수완 때문에 높은 가격을 부르던 기사들이 이내 꼬리를 내렸다.

포카라 시내는 비가 왔는지 거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너무 급하게 내려온 탓인지 가끔씩 나타나던 산행의 후유증인 무릎통증이 도진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아무튼 우리의 포터인 개다르와 뻘 때문에 즐거운 트래킹을 한 건 사실이었다.
한국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은 뒤 보답의 의미로 팁을 건냈다.
우리에겐 얼마되지 않는 돈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겐 꽤 큰 액수의 금액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듣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고생과 수고에 비한다면 터무니 없이 작은 액수였다.

 

 

 

 

 

 

 

 

 

 

 

 

 

다음날 아침, 페와호수의 보트타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자 아이...

빨래를 하는가 하면 페와호수에서 물을 길어 집으로 가져 가기도 했다.

 

 

 

 

 

 

 

 

 

 


페와호수 중간에 있던 섬.
그 섬엔 힌두사원이 있어서 이렇게 잘 차려 입은 네팔리들이 경배를 드리러 오는 모양이었다
힌두사원과 사리를 입은 여인들

 

 

 

 

 

 

 

 

 

 

 

 

 

 

 

 

 

 

 

 

어느 힌두 사원을 돌고 있는 소년...
가져간 신발을 가지런히 벗고는 이렇게 종을 울리며 지나갔다.

 

 

 

 

 

 

 

 

 

우리의 뱃사공 청년.
생긴 건 소도둑처럼 생겼어도 참 멋진 청년이었다.


 

 

 

 

 

 

 

 

 

페와호숫가의 예쁜 보트와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우연히 산책을 하면서 발견한 놀이.
정확한 룰은 아직 모른다.


 

 

 

 

 

 

 

 

 
 

 

 


소주를 연거푸 몇 잔  마셨더니, 벌써부터 어질어질해져 왔다.
여긴 해발 800m의 포카라인데다 술까지 약한 나.
그 와중에도 무릎의 통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한달음에 내려왔으니 많이 무리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2박 3일동안 우리를 안내해줬던 착한 포터, 개다르와 뻘과 헤어졌다.
예정되어 있는 헤어짐이었지만 언제나 이별의 끝은 아쉬웠다..
우리를 도와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들이었던 터라 더욱 그랬다.
마지막 악수를 나누며 그들에게 아름다운 미래의 삶이 영화처럼 펼쳐지길 기원했다.

우리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 방이 없어서 그 앞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어야 했다.
오히려 시설도 깔끔하고 가격도 아주 약간 저렴했다.
하지만, 무릎의 통증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밤 새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끙끙 앓으며 뒤척여야 할 정도였다.

아침밥을 먹고 카트만두에서 처음 만났던 육규씨와 포카라 산책을 나섰다.
비 온 뒤의 거리는 깔끔해보였지만 은근히 기대했던 안나푸르나 서봉과 마차푸차레의 모습은 역시,
짙은 헤이즈 속에 감춰진 채 형태도 띄우질 않고 있었다.
날이 좋은 날엔 이들 봉우리들이 페와 호수에 거울처럼 반영으로 비춰진다는데 아무래도 계절을 잘못 고른게 아닌가 싶다.
날이 꽤 따뜻해서 두터운 상의를 벗고 다녀도 기분이 좋을 정도였다.

전화가게가 있길래 아내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며칠 만에 듣는 아내의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내와 함께 와 있어야 했는데...  사정상 같이 오지 못한 게 여행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반가움과 더불어 아쉬움이 교차되는 순간,  그래도 익숙한 아내의 목소리는 무릎의 통증마저 잊게 했다.


포카라의 2월말은 봄날같이 따뜻했다.
여전히 무릎의 통증이 남아있긴 했지만, 가벼운 산책 정도는 충분히 즐길만 했다.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만으로도 행복했다.


느릿하게 걸으면서, 여행자로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리의 곳곳을 사진에 담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내고…그렇게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런 평화로움이, 이런 너긋함이 참 좋았다.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된 보트들이 일정한 패턴처럼 나란이 묶여 있었다.
낚시하는 사람들, 물장구치는 아이들, 물을 긷는 여자아이들…
그 너머로 2월말의 눈부신 아침 햇살이 페와호수 위로 부서지고 있었다.

간단한 흥정이 있은 뒤 육규씨와 나는 룸비니에서 왔다는 청년이 젓는 보트를 탔다.
룸비니에선 돈벌이가 시원찮아 이곳 포카라로 왔다고 말하는 청년은 포카라의 물가가 너무 비싸다며 한숨을 내 쉰다.
하지만, 네팔의 다른 도시에선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이곳까지 흘러왔다고 하는 청년.
부양할 가족들이 많아서 자기가 돈을 벌어서 매월 가족들에게 돈을 붙여준다고 했다.

젊디 젊은 꽃 같은 25살의 청년.
잔잔한 포카라의 페와 호수를 미끄러지듯 보트를 끄는 그의 여린 어깨가 문득 안스러웠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들의 고단한 삶의 형태에 그들의 대단한 생명력에 경외감을 느꼈다.
몇 십년 전의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였다.
맏이로서 가족의 부양을 당연시 했던 그 때의 한국이나, 지금의 네팔의 상황이 너무나 유사했다.

청년과 꽤 많은 애기를 나눴다.
들어보니 뱃사공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부에서 허가된 라이센스가 있어야 가능하다며 지갑에서 라이센스증을 자랑스럽게 꺼내 보여줬다.
청년의 밝은 웃음에 화답으로 사진을 찍어 건내줬다.
신기하다는 듯 더 밝게 웃는 청년의 얼굴 뒤로 아스라한 작은 섬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작은 섬 안으로 많은 보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네팔리들이 또 수시로 들락거렸다.
제법 일대에선 유명한 힌두사원이 있어 많은 네팔리들이 찾는다고 했다.
네팔의 사원에선 화려한 사리를 입은 여인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빨강, 분홍, 노랑 등의 화려한 사리를 입고, 아름다운 장신구로 치장한 여인들.
왠지 그들의 가난한 삶과는 동떨어진 느낌이었지만 화려함이 눈길을 끄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결혼한 네팔의 여자들은 남편이 준 빨간색을 입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