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 고래파니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




 




 

다시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따뜻한 봄볕이 내리쬐는 그 작은 능선 위의 작은 마을에서 때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을 만나게 된다.

설산을 배경으로 책에 열중해 있는 여자였다.
얼마나 열중해서 탐독하고 있는지 가까이 다가가도 고개 한 번 돌리는 법이 없었다.
곧잘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는 서양인 여행자들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현지인이 책을 읽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늘 삶에 찌들려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만 바라보다 이런 장면을 만나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열중하는 아름다움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막 아침식사시간이 끝나서인지 설겆이를 하는 아낙네들도 곧잘 만날 수 있다.
몰래 다가가 그 뒷모습을 담았다.
톡톡 튀어오르는 물방울을 보니 얼마나 격정적(?)으로 설겆이를 하는 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히말라야 얹저리에 놓여있는 산골의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짙은 계곡까지 스며든 따뜻한 햇살인지 어느새 응달의 눈까지 고스란히 녹아버렸다.

 

 

  

 

 

 


나의 포터였던 개다르.

그는 참 순수하고 해맑은 청년이었다.
나이는 23살. 포카라 인근의 대학에 다니고 있고 네팔어가 전공이라고 했다.
졸업 후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네팔어를 가르키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방학을 이용해서 '포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사실 포터만큼 돈벌이가 되는 아르바이트도 없다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오리털침낭이 들어가 제법 부피가 나가보이는는 배낭을 그에게 맡겼고
나는 렌즈3개와 각종 사진장비들이 들어간 허리벨트와 숄더하네스를 매고 올랐다.
이동 중간에도 수시로 사진을 찍으면서 그야말로 완보로 걷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개다르는 조용히 내 곁을 지켰다.
네팔의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는 충실히 통역자로써의 역할까지 해준 탓에 트래킹은 즐거움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개다르는 나의 길동무였고 충실한 통역자였고 사진 보조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그런 그를 친구처럼 대했고 나로 말미암아 혹시 생길 지 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대화를 나눌 때는 꼭 'Sir'라는 존칭을 붙였는데 솔직히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며칠동안 함께 산을 오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많은 도움까지 줬던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호칭은 왠지 어색하고 낯설게 만들었다.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매번 부탁했지만 그는 입버릇처럼 'Sir'라는 호칭을 붙였는데,
그럴 때마다 'Do not call me Sir, we're just friend'라며 주의를 줘야 했다.
아무튼 그와 함께 해서 더욱 즐거운 트래킹이었다.


함께 산을 오르던 도 형님은 저조한 체력 탓에 매번 한참 뒤에 쳐져서 걸어올라오고 있었다.

 

 

 

 

 

 

 

 

 


정말 산책하듯 기분좋게 맑고 투명한 햇살과 바람을 가르며 트래킹을 했다.

통학 중인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었고 아이들의 사진을 담는 것 또한 작은 재미였다.

내가 웃으면 아이들도 따라 웃었고 포즈를 부탁하면 그들은 곧잘 포즈를 따라해주었다.
그들은 더 이상 내게 '스윗' 또는 '볼펜'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작은 만남이 즐거운 듯 '나마스테'라는 인삿말과 함께 미소를 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산행 중에 내려다 본 울레리와 그 계곡.

뿌연 날씨만 아니라면, 제대로 된 다랭이밭을 찍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옅은 헤이즈가 자욱하게 깔린 계곡과 여전히 황토빛으로 봄을 기다리는 밭들은 분명 새로운 느낌일 수밖에 없다.


따뜻한 햇살이 계곡 얹저리에 쏟아지고 있었다.

햇살 자욱한 날의 풍경은 때로는 가슴이 저리도록 묘한 그리움을 배출해냈다.

유년의 기억같이 따뜻한 그 그리움 속을 그렇게 떠다녔다.

 

 

 

 

 

 

 

 

 

저 멀리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과 길'은 늘 사진의 좋은 소재가 되지만 그것보다는 그 황량함이 마음에 들었다.
설산을 배경으로 척박한 산길을 저벅저벅  내려오고 사내...
사내의 시선이 계속해서 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등교하는 아이들.

아이들은 마치 날다람쥐처럼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저런 식으로 무릎에 무리를 가해서 내려온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무릎처럼 탈이 나고 말 것이라는 기우가 앞장을 섰다.

내 무릎...
난 강원도에서 꼬박 30개월의 군생활을 하면서 산만 타며 보내었다.

쫄따구일때는 바쁘게 오간다고 몰랐는데 병장으로 넘어서자 내 무릎에 이상징후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조심해야 하는 법인데 조심성없는 내 걸음걸이가 무릎에 지독한 충격을 가했던 모양이었다.

오르막을 오를 땐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는데 내리막 길에선 무릎이 지독하게 아프기 시작하더니 어떨 땐 너무 아파서 행군조차 포기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게 쌓이다보니 무릎 쪽의 연골이 손상되고 말았다.후유증은 제대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제법 무리해서 산행을 하는 날이면 으례 그런 고통이 뛰다랐고 절뚝절뚝 절며 내여와야 하는 등 단단히 곤욕을 치뤘어야 했었다.

 

 

 

 

 

 

 

 

 

 

사진을 찍을 땐, 아니 아이들에게 포즈를 요구할 땐 영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작은 감정까지 영어로 의사전달을 할 수준도 아니었지만 아이들도 영어를 이해못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땐 오히려 내 요구가 충분히 담긴 한국어가 더 적절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내 말을 이해라도 했다는 듯 이렇게 포즈를 취해준다.

"그래, 그래, 날 봐야쥐, 이리 봐줘~!"


 

 

 

 

 

 

 

 

 

작은 공터에서 그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옆엔 그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말없이 밥을 짓고 있었다.
개다르를 앞세워 그에게로 다가갔다.
사진을 찍고 싶다는 내 의사를 개다르가 네팔어로 전해줬고 사진은 바로 뽑아서 인화해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네팔 북부의 산악지방인 무스탕에서 왔다는 남자는 나즈막하게 웃었다.
그는 다름아닌 나귀를 몰고 있는 마방 중의 한사람이었다.
먼 길을 가다 중간중간 쉬면서 장비도 손질도 하고 나귀도 쉬게 하고 자신들도 쉬면서 끼니까지를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선하게 웃는 그의 웃음이 참 좋았다.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무스탕에서 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웃음은 왠지 햇살을 닮아 있었다.

 

 

 

 

 

 

 

 

 

 

 

 





 

 

그들의 취사도구는 엄청 단촐해보였다.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는 힘든 삶이라는 것을 그들의 취사도구에서도 금새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낯선 이방인인 우리를 결코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무례하게 그들 앞에 다가선 우리를 위해 환하게 웃어줬다.


물론 이 사진을 찍고는 후지 mp-300을 이용해서 인화를 해줬다.
어찌나 환하게 웃던지 내 마음까지 즐거워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사진을 찍자 뒷따라 오던 중국인들도 덩달아 합류해서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6~7명 정도의 중국인 가족이었는데 중년의 남자와 젊은 여자 2명 정도가 dslr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인 남자가 들고 있는 카메라도 나와 같은 카메라.
그의 렌즈는 28~300이었다.
여자들은 400D 또는 350D 정도로 되어보이는 작은 dslr이었지만 렌즈만큼은 역시 24~70같은 표준L렌즈였다.
중국의 경제적인 성장에 카메라에 그대로 드러났다.

내가 즉석에서 인화하는 장면을 보더니 중국인 남자는 'excellent instrument'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눈을 뜨고, 나를 봐~!, Open your eyes and just look at me~!"

사진을 찍으려는데 자꾸 녀석이 눈을 감았다.
내가 그렇게 아이에게 영어로 요구를 하면 내 옆에 서 있는 '개다르'는 내 말을 아이들에게 네팔말로 통역을 해줬다.

포터인 '개다르'가 곁에 있어서 사진찍기가 훨씬 수월했다.

충실한 내 사진 보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도 예전의 잉케(몽골의 운전기사)처럼 우리의 방식에 순응하며 적응해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그래, 개다르...

우리는 친구야.

단지 친구일뿐이야.

그러니, 'Sir'라는 호칭을 내게 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아.

 


 


 

 

 

 

 

 

 

 

 

꼭 옆동네에 사는 처녀같은 앳띤 얼굴의 무스탕 처녀는 우리네 처녀와 꼭 닮아 있었다.
순번을 정해서 사진을 찍다 보니 이젠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합세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난리가 났다.
시간이 꽤 지체되었지만 나는 그들에게 좋은 추억 만들어주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건 나만의 즐거움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즐거움이 될 것이라며 나 자신과 타협하고 있었다.


 

 

 

 

 

 

 

 

 



좋은 추억이 되셨나요? 머나먼 무스탕에서 오신 여러분들.
추운 겨울을 피해 잠시 당신들의 고향을 떠나오긴 했지만 타향에서 좋은 추억쯤은 하나 남겨야 하지 않겠어요.
비록 힘들고 거친 삶이겠지만 내 작은 사진 하나가 먼 미래엔 소중한 추억쯤으로 남아있길 바랍니다.


 

 

 

 

 

 

 

 

 


다시 산행은 시작되었다.
울레리에서 고레파니로 가는 길.
아니, 정글지대가 나오기 까지는 수많은 롯지와 작은 마을(그래봤자 2~3가구)들이 나온다.
한 아이가 물통을 내려놓고 '나마스테'를 외친다.
아이의 머리 위엔 하얀 구름이 걸려있는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우리가 넘어가는 그 길 위로 은빛햇살이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다.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를 껴야 할 정도였다.

엄마없이 혼자 놀고 있는 한 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친구는 오전의 풍부한 햇살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햇살만큼 싱그럽던 아이는 내 카메라를 보자 금새 터뜨리고 말았다.

조용한 정적을 깨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골짜기를 파고들자, 집에서 일을 하고 있던 젊은 엄마가 나왔다.

너무 미안해서 'sorry'를 연발했지만 젊은 엄마는 복사꽃같이 환한 미소만 보이며 아이를 덮썩 안았다.


 

 

 

 

 

 

 

 

 

 

 

차가운 물에 씻겨져 하나하나 걸리기 시작하는 빨랫감들이 개운했다.
그 젖은 빨랫감 위로도 햇살은 가득했다.
뽀송뽀송하게 말라갈 그 기분좋은 느낌을 너무 좋아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을 '햇살좋은 날 잘 말라가는 빨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물기를 탁탁 털어서 빨랫줄에 옷을 늘고 나면 상쾌한 기분이 온 몸 속으로 파고 들었었다.

슬픔같은 물기가 온전하게 바싹하게 말라갈 것 같은 청량감이 전이되어 온 탓이리라.


 

 

 

 

 

 

 

 

 

양철판 위로도 햇살은 자욱하게 깔려 있다.
상큼한 레몬차 한 잔을 마신 뒤에 아래를 내려보는데, 한 할머니가 이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나른한 햇살만큼 할머니의 얼굴에도 그 햇살이 번져가고 있었다.

햇살은 그리움이고 해방구였으며 절친한 나의 동무였다.

햇살익 곱게 가르는 그 언덕에서 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봤었고 무지개를 떠올렸다.

그건 희망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이렇게 짧은 트래킹은 내게 무척 많은 고민과 생각을 안겨주었다.


 

 

 

 

 

 

 

 

 

 

우리와 함께 휴식을 취하던 짐꾼을 잠시 카메라에 담았다.
무거운 짐을 이마로 받춰들고서도 여유롭게 웃어주는 쎈쓰를 발휘하는 사내.
사진 한 장을 건내자 그의 웃음이 다시 햇살처럼 번져갔다.


비록 가난하고 힘든 삶이지만 네팔리들의 가슴 속에 햇살을 하나씩 껴앉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들의 맑고 환한 미소가 이내 지친 내 몸에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본격적으로 정글지대를 관통하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데다 날이 따뜻해져서 그런지 정글지대를 관통하는 작은 길은 온통 진흙물로 질퍽거렸다.
우리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유럽 여자 3인방 중 한 명이었던 마가렛.
사진을 찍으려 하자 부끄럽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독일처녀 캐런이 막 작은 오르막을 오를 즈음, 짐을 진 포터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오르는 자와 내려오는 자의 그 묘한 대조가 눈길을 끌었다.
삶은 저런 게 아닐까.
힘겹게 오를 때가 있으면 또 힘겹게 내려올 때도 있는 법.


 

 

 

 

 

 

 

 

 

 

정글지대를 통과하면서부터 인적이 뜸해지고 그 많던 롯지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피사체는 우리와 엇갈리는 사람들, 즉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맞춰지기 마련이다.
카메라를 들자 내려오던 포터가 환하게 웃는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인사를 건내면 늘 그렇듯이 환하게 웃는 네팔리들.
작은 인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웃을 수 있는 그들.
경직된 얼굴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나보다 조금 앞서가는 마가렛.

오후가 되자 파랗던 하늘이 닫히고 먹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울창한 정글지대를 지나다보니 셔터스피드 확보까지 용이하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도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던 마가렛.
곧잘 나에게 따라잡히기도 하지만 중간중간 촬영을 하면서 여유롭게 가던 나보다도
더 부지런하게 산행을 하고 있다.


 

 

 

 

 

 

 

 

 

고레파니로 향하는 길엔 우리같은 트래커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산 위에 사는 현지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인 듯 했다.
얼마나 짐이 무거웠는지 연신 뒤뚱거리면서도 용케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쉬다가 가고, 쉬다가 가고...


그러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자주 이곳을 오르내리는 그들이라도 무거운 무거운 것이고 힘든 건 힘든 것이리라.

 

 

 

 

 

 

 

 

 

올라가던 독일처녀 캐런이 힘이 들었나 보다.
조그마한 돌맹이 위에 풀썩 주저 앉더니 물을 시원하게 들이킨다.
그 짧은 순간을 비집고 다시 장사꾼들이 느릿하게 산을 오르고 있다.

즐기는 자와 살아가는 자와의 차이.
나는...
단지 유희로써 이 산을 오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어느새
윗 고레파니에 도착했다.

이곳엔 체크포인트가 따로 놓여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경찰(혹은 군인)이 반갑게 우리를 보여 웃었다.
예전 같으면 이곳에 마오들이 지키고 있었을 텐데 정부군과의 휴전 이후부터는 정부군 경찰들이 이곳에 주둔한다고 한다.

"어디서 왔어요?(Where are u come from?)"

한 녀석이 대뜸 그렇게 물어왔다.

"한국에서 왔다(from Korea)"라고 했더니...
"남한요(South Korea)?" 이라며 다시 묻는다. ㅡ,.ㅡ"
"그럼, 남한이지요...(yes, south korea) 북한 사람 본 적 있어요? (Have u ever met North Korean before?)

나도 아직 북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I never met North Korean before)" 했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아...
늘 무거운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는 사람들을 만날때면 가슴이 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늙은 짐꾼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네팔의 상징, 지혜의 눈.

 

 

 

 

 

 

 

 

 

 

 

안개가 자욱한 윗 고레파니.

카마리 롯지에 짐을 풀고, 인근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저녁이 되자 날이 추워지는데다, 안개까지 자욱하게 끼기 시작했다.
안개낀 경치는 또다른 느낌이지만 이 상태로 가다간 내일 새벽의 일출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천지신명이여 부디 우리를 굽어살피셔서 좋은 날만 가득하기를...


 

 

 

 

 

 

 

 

 



오른쪽에 보이는 곳이 바로 우리가 하루 묵었던 카마리 롯지.

동네를 한바퀴 돌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정글지대를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함께 올라왔던 장사꾼들이 각 롯지를 돌며 뭔가를 팔고 있다.
언뜻 살펴보니, 야채류와 잡다한 생필품이었다.
그 광주리엔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셈이었다.

한 평생 그 삶을 짊어지고 먼곳으로 올랐을 그들의 힘겨운 삶...

네팔은 꼭 한 번 삶을 돌이켜보게 했다.

그게 네팔이었다.

 

 

 

 

 

 

 

 

 


롯지 옆에서 혼자서 눈을 치우고 있는 아줌마.

힘좋은 남정네는 어디 가고,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