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 히말라야에서 함께 살자고 하는 네팔아가씨



 

 

아침녁의 하늘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너무도 파랬다.
돌을 던지면 풍덩하고 하얀색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파장을 퍼뜨릴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파랗다.
작은 경비행기들이 수시로 파란 하늘 속을 헤집고 다녔다.

짙은 엔진소리가 어느새 고레파니에 가득했다.

갑자기 저기에 타고 있을 미지의 사람들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이곳의 풍경을 여과없이 조망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부러움이 싹텄다.

하늘에서 보는 세상은 분명히 또다른 아름다움이리라.


 

 

 

 

 

 

 

  

고레파니 쪽으로 흘러들어오는 부드러운 아침햇살이 아침 안개와 더불어 계곡을 감싸고 있었다.
왠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히말라야의 아침은 의외로 부드러웠고 명징했으며 또 산뜻했다.
다양한 느낌으로 와닿는 고레파니에서의 아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말로도 제대로 표현조차 안될 내 어설픈 감동이 그때처럼 부끄러워졌던 적이 있었던가.

 

 

 

 

 

 

 

 

 

 

어두운 밤의 체취를 털어내려는 듯 아낙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한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지만 그녀에게선 새로운 아침이 묻어났다.
늘 맞는 아침이고 대수롭지 않게 대하던 아침이지만 장소에 따라서 이렇게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그 날의 내 기분과 느낌 때문이었을까.

추억하는 지금은, 그날의 쌀쌀한 바람마저 신선하게 느껴진다.

 


 

 

 

 





 

 

 

 

 롯지에서 바라보는 다울라기리.

수시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광경도 우리같은 여행자에게나 새로움을 선사하지...
막상 버거운 일상 속에 살다보면, 아름다움은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 것이다.

그래도, 난...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고 당당하게 애기 할텐데...

 

 

 

 

 






 



 

살이가 고단한 건 비단 사람들만이 아닌 것 싶었다.
매일같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수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나귀들의 삶은 또 어떤가.

녀석들의 고단함을 우리 같은 여행객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마는,
녀석들의 커다란 눈망울만큼은 언제봐도 슬퍼보였다.
말못하는 짐승이지만 슬픔은 온 몸에 배여있는 듯이 느껴졌다.

나귀가 살아야 하는 태생적 운명 그렇게 점철되어졌다지만 흔한 감정이입 때문에 왠지 내 마음마저 슬퍼졌다.

 

 

 

 

 

 

 

 

 

 

나귀들을 몰고 가는 어린 목동.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쉽게 만나게 되는 마방의 아이들.

먼길을 따라온 탓에 지치고 힘들 법도 할 텐데 카메라를 보자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도, 무스탕에서 왔다던 그 마방의 선발대인 쯤으로 보였다.

이미 한 차례의 조우가 있었던 탓에 내 얼굴이 익숙해졌으리라.

 

 

 

 

 

 

 

고운 입자의 햇살이 낮은 언덕에 자리잡은 마을 위로 부셔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다랭이 밭과 무거운 짐을 진 나귀들과 그것들을 이끌고 가는 마방의 목동들의 모습이 이젠 낯설지 않았다.
머나먼 히말라야에도 여전히 삶은 있었고 햇살은 거치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이런 작은 풍경들이 왠지 정겹다.

너무 흔하게 놓여진 길을 따라 마냥 걸으면서 만나게 되는 그들의 낯설고 힘든 삶이 애달팠고,
볼품없는 세간살이를 볼때면 측은지심이 떠올랐지만 영속되는 그들의 삶 때문에 정겨움은 커져갔다.

 

  

 

 

 






 

 


디디는 묵은 빨래를 꺼내 정갈하게 빨아 늘고는 오랜만의 해바라기를 즐기면서
곁에 서있는 내게 끊임없이 질문공세를 퍼붓는다.
참새처럼 재잘되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질 않는다.

낯선 네팔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외워둔 터라 익숙한 말들이 꽤 들린다.

네팔 꺼스토차 라므르차(네팔 어때요? 좋아요?)
따바이꼬 남 께호(이름은 뭔가요?)

 

옆에 있던 개다르가 나보고 결혼했냐고 물어본다며 통역을 해줬다.
‘당연하지, 결혼했어요’
다시 나이가 몇 살이냐며 묻는다.

우메르 꺼띠호(몇 살이세요?)

언뜻 ‘40대’라고 애기했더니 아가씨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단다.
네팔에서의 40대는 꽤나 늙은 나이대에 속하는데 너무 어려 보인다며 놀라워 했다.
눈부신 햇살에 잘 말라가는 빨래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비록 그녀의 말이 입에 발린 칭찬이라고 해도 버터발린 모닝빵처럼 부드럽게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하산길 내내, 개다르에게서 배운 네팔의 유명한 민요 ‘래썸 삐리리’를 기분좋게 부르며 내려 왔었는데…
젊은 디디와 잘 말라가는 빨랫감 때문에 기분은 한층 돋구워졌다.


‘래썸 삐리리~ 래썸 삐리리~ 울레리 정키 다라마 번장 래썸 삐리리’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지나가는 포터들도 함박웃음을 날리며 같이 불렀다.

노래 하나로 친구가 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하물며, 외국인이 자연스럽게 불러주는 그들의 민요다 보니 동질감을 느끼는 건 당연할 것이다.
찍은 사진 중에 예쁘게 나온 한 장을 프린트해서 디디에게 선물로 건냈다.
부끄러운 듯 받으면서도… 몇 번이나 사진을 곁눈질하며 고맙다고 하는 그녀.

'디디가 자기랑 결혼해서 여기서 살자고 하네요'

통역을 해주는 개다르를 향해 '헉'하며 깜짝 놀래는 표정을 짓자 디디가 까르르 웃음을 토해냈다.
내 작은 선물에 대한 감사의 표현임을 잘 알지만 기분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 참고로 디디는 여동생을 일컫는 말이다.


 

 



 

 

 









 

 


다시 하산은 계속 되었다.

도 형님은 어디쯤 내려오시는 지 한참을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도착하지 않았다.
쉬엄쉬엄 가다보면 언제쯤 만나게 되겠지 싶어 가능한 한 느긋하게 하산이 이루어졌다.
소를 만나면 소를 찍었고 낯선 풍경을 만나면 낯선 풍경을 찍었다.

 

아마도, 지천에 신록이 무르익는 계절에 왔다면 산야와 이끼들은 연두빛으로 빛이 났을 것이다.
겨울을 갓 넘긴 이곳의 산하도 한국처럼 헐벗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저런 이끼색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삼각대를 꺼내기 싫어 짐을 벗어 그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세팅을 하고 있었다.
열중하다 보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성격이라 멀리서 사람이 오는 지도 몰랐다.
한국사람들이 방금 지나갔다는 애기를 한참 뒤에 듣게 되었다.

 

 

  

 

 

 

 

 


내리막길이라 거의 한달음에 내려온 셈이었다.
원래 계획은 오늘 안으로 포카라까지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도 형님의 늦은 걸음걸이 때문에 만약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경우,
중간에 숙소를 구할 작정이었다.

하산 전에 우리의 계획을 포터들에게 애기했더니  불가능할 것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힘들고 불가능할 경우 일정을 무리하게 추진할 계획은 없었다.
언제나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포터들에겐 ‘가능하면’이라는 단서를 항상 붙여 애기했고 희망사항이라는 전제도 달았다.

개다르는 마치 그림자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참 머물러 사진을 찍다보면 개다르는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고
그 미소가 마음에 들어 그를 향해 카메라를 겨누면 잔뜩 긴장한 얼굴이 되는 귀여운 개다르.

문득 돌아보니, 방금 지나쳐왔던 작은 레스토랑이 보였다.
사람이 그리운 듯 할머니 한 분이 앉아서 해바라기를 즐기셨다..
배가 고팠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산비탈을 깍고 또 깍아서 만들어놓은 가다랭이 밭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위에서 바라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결코 좁은 국토를 낭비하지 않은 그들의 삶에 대한 숭고했을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오밀조밀하게 조성된 작은 공간마다 경작할 밭들을 알차게 일궈놓은 그들의 힘겨웠을 살이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산비탈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잠시 더운 열기를 식혔다.
산행을 즐기기 이전부터 내리막길의 고통을 몇 번이나 겪어왔던 나로서는 최대한 휴식을 취했고

보폭에도 신경을 기울이는 등 가급적이면 무릎에 통증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길고 긴 여정이었지만 여전히 지나쳐 온 길보다는 가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아 있었고 도 형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하며 자주 휴식을 취했건만,
한동안 잊고 지냈던 무릎 통증이 은근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다지 새로운 것도 없는 풍경이지만 하산 내내 사람들의 모습만 카메라에 담았다.
렌즈도 50mm f1.8 하나만 사용했다.
중간중간 렌즈를 갈아 끼우기도 세팅값을 설정하기도 귀찮아서 f1.8에 조리개를 고정해서 사람들만 찍었다.
보통은 내가 다가가는 걸 원칙으로 했지만 다가가기 힘들면 그들이 오기를 먼데서부터 기다리기도 했다.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날씨가 궂어졌다.
아침엔 그렇게 쨍하던 하늘엔  금새 회색빛 구름이 잔뜩 뒤덮혔다.
어두운 날씨 때문에 조리개를 최대개방해 놓고도 Iso 100으로는 셔터스피드 확보도 쉽지 않았다.
수시로 iso를 올려 셔퍼스피드만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멀리서 무거운 짐 진 할머니가 올라오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할머니가 올라 오기만을 기다렸다.
망원렌즈로 갈아끼웠으면 벌써 샷을 날렸을 텐데 50mm의 한계 때문인지 가까이 와서야 겨우 몇 컷을 날릴 수 있었다.

셔터소리를 들었는지, 할머니가 슬쩍 올려보셨다.
서로 눈빛이 마주치자 나는 두 손을 곱게 모아 ‘나마스테’라며 인사를 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그럴 때면 대부분의 묵언의 눈빛으로 승낙을 해주셨다.


사람사진을 찍을 땐 허락을 먼저 받고 찍느냐 그렇지 않고 찍느냐의 사이에서 늘 갈등하게 된다.

허락을 받고 찍은 사진은 왠지 인공조미료를 탄 것 같이 담백함이 없고 작위적인 느낌 때문에 싫고

몰래 찍은 사진은 가슴 밑바닥에 올라오는 죄책감 때문에 망설여진다.

사람의 표정을 찍느냐 행동을 찍느냐에  나뉘겠고 단순한 다큐냐 아니면 구성 사진인가에 따라 또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진을 찍다보면 그런 작은 갈등들이 수도없이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시골에 계시는 외할매 생각이 났다.

손마디가 굵게 굳어버린 그녀의 오래되고 볼품없는 뭉특한 손가락을 바라볼 때면 더욱 그랬다.

그녀는 곁에서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는 날 위해 가끔 미소를 띄우며 뭔가를 애기하려고 애썼지만 나는 언제나 미소만 지어야 했다.

오랜 세월을 울레리의 언덕에서 그렇게 삶을 살았을 그녀였다.
그녀에겐 이곳이 세상의 처음이자 끝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의 삶은 천형처럼 이곳에 터전을 내렸고 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을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단지 울레리에서 바라보는 이 좁은 하늘이 세상의 전부리라 착각하며 살았을 그녀였다.


가끔, 삶은…
계곡 위로 날아오르는 송골매처럼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때론 길이 없는 길로 가보는, 무모하면서도 치기어린 모험까지도 과감하게 결행해야 한다는 게 신조처럼 생각의 벽에 붙어있다.
한 하늘만 바라보면서 매일매일 조금씩 늙어가야 하는 삶은 내 자신을 얼마나 피폐하고 처참하게 만들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졌다.
어릴 때부터 방랑벽에 미쳐 이리저리 참 많이 쏘다니긴 했지만 문득 떠나온 길 위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렇게 살아가고 늙어가는 게 세상의 전부가 아닌 것을 느끼게 되면서부터는 끊임없이 배낭을 꾸렸다.

세상은 넓고 가고 싶은 곳은 여전히 많았다.
우물 안의 개구리마냥 아둥바둥 치고박고 싸워도 세상 밖에서 바라보는 우물안의 풍경은 확연히 달랐다.
여행은 그렇게 갈증이 되어 찾아왔다.
끊임없이 샘솟는 샘물처럼 그 갈증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해서 시도때도 없이 떠남을 종용했고 그럴때마다 낯선 길 위에 섰다.
가끔씩 맛보는 비릿한 자유에 대한 쾌감, 오로지 홀로 남았다는 오롯한 해방감이 감정을 더욱 부추겼던 모양이었다.
결코 고인 물로 썩지 않겠다는 작은 바람은 조금씩 이루어졌고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편협한 사고를 털쳐버리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