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30분 허조우로 떠나는 칭을 버스에 태워 보내고 혼자 쓸쓸히 천장대로 향했다.
희안하게도 랑무스에 머무는 3일 내내 제대로 된 일출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낮에는 그야말로 화사한 '써니데이'를 연출하던 날씨가 왠일인지 새벽만 되면 잔뜩 구름으로 뒤덮혀 있어서
새벽마다 깨어나서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실망만 가득 안은 채 다시 자리에 눕기를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텅빈 랑무스 시내를 가로질러 그렇게 투벅투벅 천장대를 향해 걸었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간쑤성 쪽 랑무스에는 코라를 돌고 있는 수많은 티벳인들의 경건한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눈빛이 마주치는 분들에겐 고개를 숙여 목례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따시뗄레'라는 인삿말을 놓치지 않고 건냈지만
죽음의 땅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은 결코 가벼울 수가 없었다.
거기다 하늘의 구름마저 낮고 음산하게 드리워져 있었으니 걸음걸이는 자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1966년부터 10년동안 진행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그야말로 중국 현대사의 정치, 문화적 대변혁기였다.
그럲찮아도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한 공산정권은 사회 정화를 이유로 승려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거나 탄압하는가 하면,
수많은 라마불교의 사찰과 문화재를 유린하고 파괴했으며 티벳인들의 민족성마저 말살하려는 음모를 드러내면서 악랄함의 극치를 보였다.
중공의 무력에 의해 티벳이 중국에 강제합병이 된 직후에 달라이라마는 쓸쓸하게 인도로 탈출해야 했지만,
지옥같은 10년동안의 문화대혁명 시절에도 달라이라마의 초상을 가슴 속에 몰래 품으며 혹독한 시련을 견뎌냈을 지도 모른다.
티벳인들에게 있어서 불교란 삶 그 자체이며, 불교를 떠난 그들의 삶은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활불로 추앙받는 달라이라마는 신, 그 이상의 존재였다.
비록 60년 넘는 세월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말로 못할 수모와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런 과정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점은
어느새 중국에 동화되어 가고 있어서 젊은 세대들은 가슴 아픈 식민지 현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간헐적으로 대중국정부에 대한 투쟁이 일어나긴 하지만 서슬퍼런 가혹한 중국 군경의 탄압도 문제겠지만,
중국정부의 편향적이고 편파적인 교육과 보도 덕분에 예전같은 민족주의 의식은 많이 수그러 들고 말았다.
중국정부의 강압적인 동화정책이 아무리 치졸하고 끈기있게 전개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티벳인들의 본성에 흐르고 있는 종교적인 믿음에 대한 근간까지는 감히 흔들리지 않고 있다.
티벳인들은 여전히 라마불교를 숭상하고 활불의 존재를 믿으며 거룩한 땅 라사로의 힘들고 거친 오체투지를 통한 순례길을
결코 마다하지 않고 있으며 티벳초원의 곳곳엔 티벳의 전통의상을 입은 유목민들이 말을 달리고 있다.
중국 정부는 조장鳥葬을 원시적이고 비인간적인 장례의식이라며 강력하게 금지시켜 왔지만,
초원처럼 건조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형성된 티벳 전통의 장례의식인 '조장'은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다.
조장을 기록한 글과 사진을 보면 대개 미개하거나 잔인한 의식쯤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티벳인들의 전통적인 의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전부터 하늘을 신성시했던 티벳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새에 의해 하늘로 육신이 전달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새를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메신저)로서의 역할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장을 다른 말로 천장天葬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는 삼한시대의 소도신앙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 솟대라는 구조물로 전승되어 온 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
솟대의 끝을 보면 기러기 또는 오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조류가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신라시대의 금관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몽골여행편 참조)
티벳인들은 지금도 닭같은 조류는 물론이고 달걀도 먹지 않는다.
(물론 관광지화 되어 버린 지역에서는 닭으로 조리한 음식을 관광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이런 생각과 더불어 시신이 잘 썩지 않고 화장을 하고 싶어도 나무가 별로 없는 초원지대라는 자연적인 특성이
조장같은 장례의식을 더욱 활성화시켰으며 지금도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의례인 것이다.
혼자 오르는 길이었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천장대로 향하는 아름다운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티벳여인들과도 잠시 동행이 되었고,
한참 사진을 찍다 돌아보니 어제 잠시 카페에서 만난 중국 아가씨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침부터 서둘러 나온 걸 보니 다들 천장을 기대한 듯한 눈치였지만 천장대엔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휑하니 불고 있었다.
날은 흐렸고 분위기는 축축했으며 머리는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장례의식을 치를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도끼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유인의 머리카락도 곳곳에 눈에 띄였다.
뼈와 뼈를 갈았던 일종의 분쇄기와 마구 뒹굴고 있는 장례도구들로 인해 왠지 가슴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긴 날개를 가진 독수리가 푸더덕거리며 흐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스산함이 골수까지 차버린 느낌이었다.
낯게 드리운 하늘과 바람마저 숨 죽인 이곳은 그래서 더 음산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유도해내고 있었다.
'옴메니 밧메홈'이라고 적힌 유인의 명복을 비는 비석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죽음의 흔적들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숙연해졌다.
마치 죽음이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있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왠지 두렵고 심란했다.
흐린 하늘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조장했고 가끔씩 큰 날개짓을 하는 독수리들이 상공을 선회할 때는 침묵만 흘렀다.
인도 바라나시의 가트(화장터)에서는 너무 일상화되어버리고 고착화되어 버린 죽음 때문에 솔직히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시신의 행렬을 그저 무덤덤하고 태연하게 맞이하는 사람들로 인해 나까지 전염된 듯 했다.
거룩한 여신의 강인 강가강에, 죽은 몸을 의탁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사람마저 있었으니 도저히 슬픔과는 연결시킬 수가 없었다.
랑무스의 천장대는 어떤 장례의 의식도 없었지만, 네팔의 파슈파티나트(화장터)에서 가졌던 그때의 슬픔이 슬거머니 꼬리를 치켜세웠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원초적인 한기처럼 삶의 본질을 일깨우는 수많은 질문들로 인해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스산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고여있는 내 본성을 조장하고 자극하며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한동안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서는 나도 모르게 '옴메니 밧메홈'만 읊조렸다.
한 번 숙연된 마음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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