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보다 더 티벳다운 동티벳 암도지방




 어디선가 콩볶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우두둑거리며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이긴 했지만  실탄을 사용한 사격훈련 중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대번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라블랑스(拉卜楞寺)의 경계에 위치한 노마드 레스토랑에서 내려다 본 샤허(夏河)의 거리에서 잔뜩 무장한 중국군을 실은 버스 행렬을 몇 번이나 보아온 터였다.

 

철모를 눌러쓴 젊은 중국군인들의 예사롭지 않은 눈매와 코라를 돌며 열심히 마니차를 돌리고 있는 늙은 티벳 남자의 슬픈 눈빛이 끊임없이 교차되어 오버랩되었다.총소리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다가 다시 이어졌고, 티벳인들과 같이 코라를 돌 때까지도 여전히 총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려왔다.작은 긴장감이 머릿속을 팽팽하게 수축해 왔지만 정작 이곳 사람들은 일상의 한 부분이라도 되는 양 미동도 없이 낮선 이방인에게 미소를 날려주었다.낮은 구름이 하늘을 덮은 샤허의 저녁, 훈련을 마친 점령군들이 장갑차를 앞세우며 의기양양하게 시내로 들어오는 게 눈에 띄였다.한낱 중국의 일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막연했던 티벳인들의  슬픈 역사가 그렇게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샤허로 들어오는 길은, 2008년 3월의 티벳독립시위 이후 계속해서 외국인들에게 불허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기 얼마 전인 6월 28일에야 비로소 외국인들에게도 개방되기는 했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란조우의 버스터미널 매표소에서는 외국인에겐 표를 팔 수 없다면서 난색을 표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어쩔 수 없이 란조우에서 린샤를 거쳐 샤허로 들어갈 택시를 잡았고 나처럼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던 미국인 에디와 동행이 될 수 있었다.

그 전 날도 프랑스인 여행자 2명이 택시를 타고 샤허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샤허의 호텔에 전화를 걸어 외국인들의 투숙이 허용되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기 때문에 추방에 대한 불안함은 한결 덜 수 있었다.

노란 유채꽃이 활짝 피어있는 유채밭들이 먼저 시선을 끌었지만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금새 사나운 빗줄기라도 쏟아낼 듯이 음험했다.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진 탓인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닭살같이 피부가 두드러졌고 무표정한 티벳인들은 라블랑스 외곽의 코라를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중국이 무력으로 이곳을 점령하기 전만 해도 이곳은 티벳의 암도지방(현재 중국의 칭하이성靑海省 일대)에 속하는 곳이었다.

칭하이성과 간쑤성(감숙성 甘肅省)의 경계에 있는 2,920m의 작은 마을인 샤허를 가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게룩파의 6대 사원 중의 하나인 라블랑스가 있기 때문이다.

티벳인들의 지리 개념으로는 암도(Amdo)지방의 동단에 속하는 이곳은 전체 인구비율의 80%가 티벳 장족藏族으로 2008년 3월 14일 티벳독립시위가 벌어졌을 때에도 그 중심에 있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일대인 감숙성 감남 장족자치구와 사천성 아바 장족자치구는 외국인들의 접근을 차단시킨 채 여행제한지역으로 묶이고 말았다.


 













내가 우루무치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곳은 사천성과 감숙성의 경계에 위치한 유명한 티벳사원인 랑무스(朗木寺)에 있을 때였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천장대에서 새벽시간을 보내고 막 루얼까이(若爾蓋) 초원으로 가기위해 예약해놓은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급한 문자가 날아들었다.

우루무치에서 위그르인들의 독립시위가 일어났는데 중국군의 발포로 인해 3~4명이 죽었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루얼까이 초원을 다녀와서 다시 느린 인터넷으로 확인 해보니 사망자만 해도 150명이 넘는 대규모의 사태로 일파만파 번져가고 있었다.

사태의 여파는 우루무치를 넘어서 위그르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카스까지 번지고 있으며 신장일대는 국제전화는 물론 인터넷까지 차단되어 있는데다, 우루무치는 준게엄상태로 수많은 중국군들이 진주해 있다고는 하지만 산발적인 시위는 여전히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야간통행금지는 물론, 거리 곳곳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다 불안감을 더욱 조장시킨 것은 한국영사관에서 날아온 위험을 알리는 몇 통의 문자 메시지들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루무치로 거쳐 가야하는 내 입장에서는 어떤 결정도 쉽게 내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니 중국에서의 내 거취 쯤이야 어떻게든 알아보면 되겠지만 벌써 오가며 두 차례나 들렀던 우루무치에서 그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 아팠다.

어쩌면 거리에서 나와 마주쳤을 지도 모를 선량한 웃음을 가진 위그르인들이 뜨거운 여름날의 포도 위에서 붉은 선혈을 뿌렸을 것을 생각하니  명치끝이 꽉 막히는 듯한 절정의 답답함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샤허에서 들었던 낯선 총성들과 장갑차를 앞세우며 마치 시위하듯 진주하던 거만한 점령군의 눈빛들이 그제서야 되살아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우루무치 시내는 중무장한 수많은 군경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삼엄하게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무장한 군인과 경찰을 태운 군용트럭이 우루무치 시내를 돌면서 끊임없이 시위 가담자에 대한 투항 권고 방송을 강경하게 내보냈고,

공원이며 광장에는 대테러 훈련을 받는 군인들의 함성소리로 가득했다.

숙소가 위치한 곳이 한족 거주 지역이라 그런지 급속도로 일상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지만 여전히 시위가 격렬했던 중심지는 원천봉쇄되어 있었고 국제전화는 물론 인터넷까지 완전히 끊겨 있었다.

CCTV에서는 피를 흘리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한족들의 인터뷰 장면과 과격한 몸짓으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위그르인들의 모습만을 끊임없이 내보냈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내 입장에서 봤을 때도 중국 정부의 교묘하고 의도적인 편파성은 충분히 드러난 셈이었다.

하얀 눈을 소복히 머리에 두른 텐산산맥(天山山脈)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청명한 날이라는 게 오히려 부담이 될 정도였다.

중국군의 강압에 의해서 시위는 멈췄지만 위구르인들의 독립을 향한 정신만큼은 꼭 그만큼 더 높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었다.

2009년 우루무치 시위는 중국내에서 1989년 텐안문 사건 이후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시위라고 했다.












2009년 7 7

 

허조우를 경유해서 란조우로 다시 이동을 하는 날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짐을 꾸린 뒤 에디의 방문을 두드렸다.

한참 달콤한 아침잠에 빠져 있었던지 개슴츠레한 눈빛으로 문을 열어주는 에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작별인사를 청했다. 지난 일주일동안 샤허와 랑무스 등 동티벳의 일부지역을 함께 떠돌았던 길동무라서 그런지 유달리 아쉬운 감정이 들었다. 인생은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희안하게도 여행길에서 만난 길동무와의 이별은 더욱 각별하고 애뜻하게 다가왔다. 낯선 땅에서 서로 기댈 작은 등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라는 어설픈 생각... 그래서 더욱 즐거웠다. 그렇게 추억 하나를 랑무스에 남겨두고 허조우행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의 일정은 무조건 이동이었다. 허조우에서 다시 란조우(蘭州)행 버스로 갈아타고 란조우 기차역에서 우루무치로 가는 기차표를 예매할 참이었다. 한국의 완행버스처럼 버스는 작은 마을까지도 빠뜨리지 않고 정차하면서 느릿하게 달렸다. 수많은 작은 마을들 앞에서 티벳탄들을 태우고 내렸으며, 어느새 낯익어 버린 그곳의 풍경을 따라 느리게 흘러갔다. 옆에 앉은 티벳탄들에게는 시큼한 야크젖 냄새가 풍겼지만 어느새 그 냄새마저 익숙해져 버렸다.

 

타고 온 완행버스에서 막 내린 터미널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 낡고 오래되고 초라해 보였다.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왔던 다른 중국인 여행자들이 어디론가 택시를 타고 가버린 다음에야 이곳이 란조우행 버스를 타는 터미널이 아님을 깨달았다. 완행버스 터미널과 시외버스 터미널이 서로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근처에서 세차를 하고 있는 택시기차에게  다가가서 무조건  “란조우 버스?”라는 말로 물어보니 그는 대뜸 “메이요”라는 말부터 꺼내며 손싸래를 친다.  목석이 된 채 그 자리에서 눈알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자, 란조우행 버스터미널은 다른 곳에 있다면서 손으로 가리켰고 택시를 타면 2콰이 정도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택시와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아...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쎄쎄'를 연발했고, 그렇게 감사의 표시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국어를 조금이라도 배워 놓을 걸 하는 아쉬움이 휘감았지만, 일단 이동에 대한 긴장감으로 한껏 먹먹했던 가슴이 용케도 풀리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허조우 시외 버스터미널.

다행히 9 50분에 란조우로 출발하는 버스표가 남아있어서 서둘러 구매했다. 

버스에 올라타니 내 옆자리엔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작고 여린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차창 밖으로 여자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니 여자아이 혼자 란조우로 보내는 모양이었다. 모녀의 이별 손짓은 차가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점심시간을 맞아 잠시 정차한 휴게소에서 아이스크림 한 개를 사서 여자아이에게 건내니 “쌩큐”라며 귀여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유달리 흘깃흘깃 쳐다보던 여자아이는  내가 중국인이 아님을 알아차렸던 모양이었다.

장거리 이동이 처음이었는지 여자아이는 연신 뭔가를 비닐종이에 게워내고 있었다. 여린 소녀의 고통이 유난히 안쓰러워 등이라도 어루만져 주고 싶었지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싶어서 그저 “are u OK?”라는 말로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잠을 청하고 싶어도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경적소리 때문에 귀는 어느새 멍이 들 지경이었고,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는 지독한 차량의 들썩이는 요동 때문에 피곤함이 저절로 누적되어 갔다. 그러던지 말던지, 곁에 앉은 중국인들은 태평스럽게 잠만 자고 있었다. (아마도 몸이 제대로 피곤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 정도의 복잡한 상황 정도은 인도,네팔,베트남 등지에서 이미 수차례 겪었고 꽤나 이런 상황에 대범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낯설게 다가왔다.)

 

풍경이 어느새 바뀌고 있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수시로 보이는 모스크들, 벌거숭이 산들로 채워져 있던 산야는 어느새 푸른빛이 감도는 계곡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바깥의 풍경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모습도 달라졌다. 후이족(回族)의 땅. 이슬람을 믿고 있는 후이족들의 땅으로 시나브로 들어온 것이다. 수염을 덮수록하게 기르고, 작은 모자를 쓴 회족 남자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중국의 변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런 인종의 또는 민족의 다양성이 내 시선을 유독 끌었다. 그렇다고 척박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 동네는 어디를 가도 척박했다.  

 

그렇게 란조우에 도착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로 인해 눈이 휘둥그레졌다. 역시 도시는 내 체질이 아닌 것 같다.

적당하게 편안했던 샤허와 랑무스에서의 며칠은 그야말로 꿈같이 달콤한 나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울려퍼지는 경적소리들, 뒤틀려있는 차량들, 높은 톤으로 뭔가를 외치는 사람들, 그야말로 혼을 빼놓기 딱 알맞았다.

비록 며칠동안이지만 이런 현란하고 복잡한 도시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건 정말 축복이었다.

 

그래도 움직여야 했다. 택시를 세워 “훠춰잔(기차역)”이라며 무작정 택시기사에게 말을 건내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가이드북대로 움직여야 한다.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호텔과 가이드 북에 나와있는 경로…

그것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중국여행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보류였다.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바로 우루무치 사태였다. 한국으로 떠날 비행기가 바로 우루무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사태의 정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우루무치로 돌아가야 했다.

 

아직 인터넷으로 정확한 정황을 살펴보지 않아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며칠 전 아내에게서 받은 문자에서는 우루무치 사태가 꽤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외교부에서도 몇 번이나 우루무치 사태에 대한 경고 문자를 계속해서 보내오고 있던 터라서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마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이미 정한 여정대로 움직이는 게 상책인 것 같았다.

화교빈관(158위안)에 방을 잡고 기차표를 끊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처음이라 그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낯선 한자 때문에라도 그렇지만 가고자 했던 돈황행 표가 이미 매진이어서 더욱 그랬다. 랑무스를 떠날 때 세웠던 계획은, 돈황을 거쳐 우루무치로 입성한 다음, 우루무치에서 가보지 못한 몇 군데를 추가해서 돌아다닐 계획이었다. 그런데, 돈황행 표는 벌써 며칠 후까지 매진된 상태였고, 우루무치행 표도 당일 표는 물론이고 며칠 뒤의 표까지도 매진이었다. 알 수 없는 혼돈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빛이 보이지 않는 암흑이 펼쳐졌다. 거기다 궁색하고 초라한 내 모습을 본 공안의 검문까지 받으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역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일련의 한국 대학생들에게 도움을 청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교회 행사를 위해서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그들에게 괜한 나의 접근은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돈황으로 가지 못한다면 가욕관으로 이동한 뒤 하루를 보내고, 다시 돈황으로 가서 하루를 묵은 뒤 징검다리를 건너듯 그렇게 우루무치로 올라가는 건 어떨까도 생각해 봤지만… 딱히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사막이라면 선선에서도 봐왔던 터라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빌 그곳을 굳이 택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다행히 내일 우루무치 기차 중에 잉워석(침대칸) 8표나 남아있은 기차가 있다는 것을 전광판을 통해 확인이 됐다. 그래, 우루무치로 가자. 이곳에서 우루무치로 기차가 다닌다는 것은 그곳의 상황이 악화일로로 전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우여곡절 끝에 잉워석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 그 날의 여행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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