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을 준 명품백을 아내에게 선물한 사연









2년 동안 잘 사용하고 있던 아내의 가방이 결국은 말썽을 일으키고 말았다.

며칠 동안 지퍼가 뻑뻑해서 조금 힘을 줘서 여닫았더니 마찰에 약한 천 부분이 그만 떨어져 나가버렸다고 한다.
사실 이 가방은 우리 부부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니만큼 아내는 애지중지하며 소중하게 사용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실수로 인해 가방이 망가졌으니 아내는 오히려 내게 너무 미안해 했다.

 

해운대 인근의 백화점에 다행히 그 가방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었다.
가방을 들고 찾아가서 문의를 했더니, 정식으로 국내에 수입된 제품은 아니지만 다행히 서울 본사 쪽에 부품이 남아있어서 수리는 가능하다고 했다. 수리 비용은 왠만한 가방 하나쯤은 거뜬히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지만 남편이 처음(이자 지금까지는 마지막)으로 선물해준 명품백인데다 우리 부부의 상징적인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가방은, 결혼 10주년과 아내의 임용고시 합격 기념으로 내가 이탈리아 여행 때 힘겹게(?) 구입해서 아내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이제는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다고 해서 ‘30초 백이라는 별칭이 붙여진 이 가방은 사실 우리 형편에 맞지 않게 실로 만만찮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그동안 고생했던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난생 처음으로 명품백이라는 것을 남편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아내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이런 가방을 과연 내가 가져도 되냐고 몇 번이나 되물으며 반색을 짓곤 했었다.

 





 

37살의 늦은 나이에 임용고시에 합격한 아내



문득 아내 자랑을 하려니 팔불출이 된 것 같아  망설였지만 이 포스팅을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 어쩔 수 없이 해야겠다
.

아내는 37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그 어렵다는 교원임용고시에 덜컥 합격하고 말았다.
물론 아내의 불타는 열정을 이끌어낸 것은 2년 동안 몸 담았던 사립학교에서의 참담하고 쓰라린 실패의 경험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정 하나만으로 1년간 공부해서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는 것이 어지간해서는 쉽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고서야 비로소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외조를 잘 해 준 것도 아니었다.
사진과 여행에 미쳐있던 나는 아내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잘도 쏘다니며 사진을 찍어댔으니 그녀의 합격은 내게 미안함만 가중시키는 역할만 했다. 아무튼 37살의 늦깎이 신입 선생님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었고 뭔가 뜻깊은 선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비싼 선물이 반드시 뜻깊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자라면 한 번씩 꿈꾼다는 '로망의 명품백'을 한 번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머릿 속을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치욕을 선사해준 루이뷔똥

 


내가 명품백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해 준 것은
10년 전쯤 IMF가 끝나고,
다른 업무로의 전환 때문에 다니던 회사에 잠시 휴직계를 내고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스산하고 추운 빠리의 상젤리제 거리를 아내와 함께 거닐고 있었는데 한 동양인 여자가 다가와서 말을 붙이는 게 아닌가.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신분을 밝힌 여자는 상젤리제 거리에 있는 루이뷔통 매장에서 가방 2개를 사달라며 부탁을 해왔다.
물론 가방을 사주면 적당한 선에서 커미션을 지불하겠다고 달콤한 유혹을 해왔지만 왠지 못미더워서 단번에 거절했다.

그때 처음으로 세상에는 범접할 수 없는 가격대의 명품백이 존재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
언뜻 매장에 전시되어 있는 작은 손지갑을 한국돈으로 계산해 보니 그때 금액으로만 해도 대략 80만원에 육박했다.
손바닥만한 작은 지갑이 80만원이라니 그야말로 뜨악소리가 저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거기다 더 웃기는 건 루이뷔통의 한국인에 대한 한정 판매정책이었다.
한국 여권을 제시하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1인당 살 수 있는 개수는 단 두 개로 정해져 있었다.
그것도 백종류의 가방 하나에, 작은 지갑같은 종류로 한정해놓고 판매하고 있었는데,
미리 여권번호를 구매시 일일히 적어놓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와서 살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과소비를 적절하게 막기 위해 일부러 그런 정책을 펴지는 않았을 테고  어떤 이유가 분명히 있어서 그랬겠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이런 한정판매 정책은 한국인에게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었다.
조선족 대부분이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도 일정 기간 내에 구매할 수 있는 개수는 지정되어 있어서
지나가는 한국인 여행자들을 어떻게라도 유혹해서 루이뷔통을 구매하게 하고 있었다
.
이렇게 구매한 물품은 한국이나 중국 등지로 팔려나가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고 했다.
그렇게 판매해서 남는 마진만 해도 어마어마 하다고 하니 조선족 여자가 눈에 불을 켜고 한국인 여행자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했다.
배낭여행자 입장에서도 며칠 분의 방값을 상회하는 커미션을 벌 수 있으니 남는 장사이긴 마찬가지였다.
악어와 악어새처럼 어쩌면 그들은 윈윈 전략을 같이 공유하는 공생관계였던 셈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런 한정판매 정책이 일본인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돈만 있으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일본인들은 쇼핑백마다 명품들을 수집하듯 사들고 다녔다.
물론 자본주의 논리상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왠지 치욕처럼 느껴졌다.
어찌보면 한꺼번에 이익을 많이 보기 위해 사재기를 하는 한국인과 조선족(또는 중국인) 상인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웃지 못할 슬픈 해프닝처럼 뒷맛이 씁쓸하게 여운을 남기는 것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국력의 차이가 이런 명품가방의 판매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니 한 마디로 기가 차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말도 안되는 논리는 또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지금이야 한국의 백화점까지 스며든 루이뷔똥이라는 브랜드가
‘30초 백이라는 이미지로 전락해 버린데다  
어디에서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제품이 되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이 브랜드는 한국인에게 도도한 콧대를 잔뜩 세운 채 살테면 사고 말테면 말아라식의 막가파 판매전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루이뷔똥,  이 치욕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아는 브랜드라고는 루이뷔똥밖에 없었다.ㅠ.ㅠ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날
, 로마의 명품거리라고 불리는 콘도티 거리Via dei Condotti로 나왔다.
지하철 역을 빠져나와 스페인 광장쪽으로 걷다보면 해지는 서쪽으로 길게 뻗은 거리.
그런데 익숙한 간판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바로 8년 전 한국인을 치욕으로 몰고간 그 브랜드였다.
두 주먹을 쥐고 이를 부르르 갈았지만 내가 아는 가방 브랜드라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없었다.
(
사실 지금도 그 브랜드 말고는 다른 브랜드를 잘 모를 뿐 아니라 여전히 이 분야는 관심밖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더니어느새 내 발길이 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ㅠㅠ

 

여행기간이 일주일이든, 열흘이든, 한달이든,또는 두 달이든 그 기간에 구애받지 않고 나는 면도를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에 젤을 바르는 일 따위는 절대 내 여행기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속옷은 거의 매일 빨지만 겉옷은 지나치게 더럽혀 지지 않는 이상 빨지 않는다는 게 또 내 여행의 소신(?)이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허리춤에 몇 개의 렌즈통이 달린 벨트를 매고 다니기 때문에 스타일은 그야말로 후줄근할 수밖에 없다
.
그것도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으니 그야말로 몰골은 말을 애써 사족을 달지 않더라도 엉망진창이었을 것이다.
꾀죄죄한 몰골 때문에 쫓겨나올 수모까지 각오하며 매장에 들어섰는데 의외로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들른 유럽여행사이트에서 패딩조끼를 입고 들어갔다가 쫓겨났다는 사연을 읽은 적이 있어서...
8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불손한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사뭇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매장에서는 오히려 동양인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듯이 한결같이 동양인들에게 더 친절했다.
말끔하고 정갈한 검정색 유니폼으로 잘 차려입은 직원들이 카탈로그를 원하는 내게 오히려 깍듯한 태도로 선뜻 카탈로그를 제시했다.
비록 매장은 다르지만 8년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풍토에 어리둥절해진 건 나였다.

 

한국 아줌마들이 들고 다니는  흔해빠진 그 루이뷔똥 가방만 생각하며 카탈로그를 받아서 살펴봤는데  
한 브랜드에도 이렇게 다양한 제품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사진으로만 구성된 카탈로그를 보고는 도저히 고를 수 없을 정도였으니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우쭐대며 의기양양했던 태도는 어느새 쏙 들어가고,
이제 아내가 좋아할만한 제품을 제대로 고르는 데에만 온 신경이 쏠렸다.
괜히 비싸게 선물을 하고도 아내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아내가 연애시절부터 줄곧 어깨에 매고 다니던 핸드백이 떠올랐다.
그 정도 크기, 그런 종류의 제품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진열된 상품 중에 비슷한 제품이 있는 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있었다.
가격도 생각만큼은 비싸지 않았다. 상대적인 것이긴 하지만, 진열된 다른 상품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저렴했다는 뜻이지  꽤 비싼 편이긴 했다.


쇼핑백에 가방을 담아 나오면서 선물을 받고 기뻐할 아내의 얼굴을 애써 떠올리니
한 편으로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았다.

 

다행히 가방선물을 받아 든 아내는 아주 흡족한 표정이었다.

이런 가방을 들고 다녀도 되는 지 모르겠다며 오히려 반색을 하면서도 디자인도 예쁘고 사이즈도 마음에 든다며 나의 탁월한 선택을 한껏 추켜세우는 것을 보면 결코 싫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반증하는 셈이었다.

우리 결혼 10주년과 자기의 임용고시 합격 선물이니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지라는 닭살 같은 멘트를 사정없이 방긋방긋 날렸지만
8년 전 빠리의 상젤리제에 위치한 루이뷔똥 매장에서 한국인들이 겪었을 수모는 말끔히 잊고 있었다. 
간사한 게 사람의 마음이라더니 8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치욕의 사실을 깨끗이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망각의 강 위에 떠다니는 반영처럼 환하게 웃는 아내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그래도 어쩌랴, 아무도 기억조차 못하는 지난 날의 황당한 치욕보다는 아내의 행복한 웃음이 나를 반겨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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