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로마에서 당일치기로 카프리섬을 둘러보기 위해 나폴리에 도착했을 때 일어났다.
나폴리가 위험하다는 소문을 하도 많이 들은 탓에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물어물어 R2라는 연안부두행 버스를 탔다.
오전 11시임에도 버스는 이미 손가락 하나 까닥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초만원 상태. 우리 일행은 구겨타다시피 해서 겨우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버스에 오른 지 채 1분도 안된 시점부터 무지막지한 손들이 주머니와 가방 위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뒷주머니에도 손길이 느껴져 확인해보니 어느새 굳게 닫혀있던 뒷주머니의 지퍼가 열려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지갑은 그대로였다.
주변을 둘러 보니 한 손에 외투를 말아쥔 채 먼 산을 바라보는 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잠정적으로 범인임을 직감한 나는 신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매치기는 신사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낌새가 이상해서 몸을 돌려보니 목발을 짚고 있는 영감의 손이 내 가방을 더듬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아내가 영감의 손을 내려치자 자기는 목발을 든 장애인이라는 시늉으로 목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버스에 탄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매치기 패거리였던 것.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소매치기 일당이니까, 가지고 있는 복대와 지갑 조심하세요."
한국말을 알리 없는 그들 곁에서 고함을 질러 일행들에게 주의를 주는 사이에도 그들의 손은 수시로 우리의 호주머니 속을 들락날락거렸다. 그럴 때마다 뿌리치고 또 뿌리치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랜덤같은 우스운 장면이 이어졌다. 연안부두까지 가는 짧은 10여분동안은 초긴장 상태가 되어 사주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몸뚱아리 어디에선가 느껴질 지도 모를 그들의 손길을, 온 신경을 집중시켜 주시하고 있다보니 금새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다행히 몇 정거장이 지나면서 버스 안에는 여유공간이 생겼고 우리 일행들은 벽쪽으로 등을 돌린 채 서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마주보게 되었다. 유리한 위치에서 방어(?)를 할 수 있게 된 셈이었지만 팽팽한 긴장감은 여전했다.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음을 깨달은 소매치기 일당들도 웃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유연한 태도를 보여왔다. 친근감을 표시하려는 듯 일당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뭔가를 물어오기까지 했다.
소매치기 : "야뽕?"
우리일행 : "노~! 꼬레아"
그리고는 이탈리아 말로 속사포처럼 뭔가를 물어왔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우리로서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행여나 있을 지 모를 그들의 접근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면서도 머리 한 켠에 고인 습기같은 기분나쁜 느낌들은 여전히 끈적했다. '자슥들~ 왜 일본사람이라고 먼저 묻는 거야' 긴장을 끈을 결코 놓을 수 없는 그 심각한 상황에서도 갑자기 빈정이 팍 상했다.
내 주머니를 공략하던 신사가 어설픈 영어로 '어딜 가느냐?'고 물어왔다. '카프리'로 간다고 하자 다음 정거장에 내리면 된다며 친절하게 손짓까지 해줬다. 그 짧은 10여분이 마치 10시간도보다 더 길게 느껴졌던 건 악몽같은 기억의 잔상효과 때문이리라. 버스에 내리자마자 마치 해방된 조국에 당도한 것처럼 안도감과 환희에 넘쳐 감격했지만, 너무 가방을 꽉 쥐다보니 손아귀와 팔뚝의 마비증세같은 고통도 덩달아 겪어야 했다.
어떻게 보면 참 친절한 나폴리사람들인 것만은 사실인데, 사람들이 밀착해 있는 만원버스 속에선 다들 소매치기로 변신해야 하는 슬픈 나폴리 사람들의 현실이 왠지 씁쓸했다.
1. 바르셀로나에서 목격한 첫번째 유형
구엘공원을 가기 위해 막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로 나오던 참이었다.
앞에서 중년 아저씨의 거친 고함소리가 들려 그 쪽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스페인말로 외치는 고함이었기에 비록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치로 끍어본 대략적인 전말은 이랬다. 막 지하철 출구로 빠져나오는 중년 아저씨의 손에서 젊은 사내가 뭔가를 낚아 챈 것이었다.
"뭐야? 왜 남의 물건을 가져가는 거야"
그렇게 중년아저씨가 따져묻자 젊은 사내는 힐끔힐끔 바라보며 뒤걸음질만 쳤다. 도둑이라는 걸 반사적으로 직감한 중년아저씨는 흥분된 고함소리를 날리며 잽싸게 뒷걸음질 치는 젊은 사내를 잡으려고 했다. 작정하고 덤벼든 젊은 사내의 날렵함을 따를 수 없었던 중년아저씨의 '도둑이야'라는 고함은 오히려 안타까움처럼 공허하게 들려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타난다는 짱가의 주제가처럼, 경찰 2명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더니 젊은 사내를 쫓기 시작했다. 너무 급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이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젊은 사내와 추격하는 경찰은 이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짧은 순간, 지하철 출구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젊은 사내가 잡혔는지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들의 추격전을 목격한 마지막 장소로 올라가봤지만 어디에도 그들의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이내 거리는 급속도로 평온을 되찾아갔다. '평온한 틈을 타서 오늘도 귀중한 여행자의 지갑을 노리는 녀석들은 곳곳에 깔려있으리라.' 손에는 그저 아무것도 들고 다니지 않는 게 상책이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2. 바르셀로나에서 목격한 두 번째 유형.
몬주익 언덕을 갔다가 스페인 광장 근처에서 사진을 좀 찍고 다시 람블라스 거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숙소가 람블라스 거리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람블라스거리로 돌아와야 했다. 람블라스로 돌아오는 한적한 지하철 안에 앉아 있을 때였다.
지하철 문이 막 열리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여행의 막바지였지만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만큼은 절대 긴장을 풀지 않았기 때문에 얼른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먼저 차안으로 들어온 일본 여자와 스페인 남자 3명에게 옷을 잡혀 한창 실랑이를 벌이다 뒤늦게 따라들어오는 일본 남자가 보였다. 스페인 남자 3명은 막 차안으로 들어온 일본남자를 밖으로 끌어 내려는 듯 완력으로 옷을 잡아끌었고, 일본남자는 끌려나가지 않으려는 듯 지하철 손잡이를 잡는 게 순간적으로 보였다. 일본 남자애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진 걸로 봐서는 꽤나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음이 분명했다.
상황이 악화되면 도와줄 생각으로 비상시를 대비해 독일에서 구입한 강도퇴치용 가스분사기를 사용하기 위해 뒤적이며 찾기 시작했다. 일본남자는 성가시다는 듯이 스페인 남자들을 밀쳐내고 있었는데, 그때였다. 일본 남자의 잠바에는 끈적한 가래같은 액체가 묻어 있었다. 일본남자의 옷을 잡고 완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했던 스페인 남자들의 행동은 일본남자의 잠바에 묻은 뭔가를 닦아주려는 의도에서 비릇된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굳이 싫다고 하는 사람을 붙잡고 거의 폭력에 준하는 강압적인 행동으로 일본남자를 제압하는 것은 뭔가 의도된 저의가 깔려있을 게 뻔했다.
아, 그거였다. 샴푸 등의 끈적한 액체류를 관광객의 옷에 묻여 의도적으로 접근한 다음, 옷을 닦아주는 척 하면서 소매치기를 일삼는 일당이 있다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옥신각신하는 사이 스페인 남자들의 또다른 손들은 쉼없이 일본남자의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뜨고 코베이는 꼴이었다. 문이 닫힐 무렵에야 스페인 남자들은 마지못해 내렸지만 황당한 상황을 겪었을 일본남자를 보니 새삼 측은지심이 생겼다.
이렇듯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적인 상황은 어디에서나 생기기 마련이다. 그걸 당한 사람이 '오늘의 내'가 아니라서 안심하며 한 숨을 내쉴지 모르지만 같은 여행자라는 동질감은 국적을 초월해서 발생했다. 만약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하니 간담이 서늘했다.
나름대로 피사나 소렌토에 대해서는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다.
피사는 다 쓰러져가는 탑 말고는 볼 게 없다고 애기하지만, 피렌체에서 한 시간 넘게 기차 타고 또 역에서 버스타고 찾아간 피사는 아주 깊은 인상을 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눈부신 백색의 교회와 그 뒤에 쓰러져 가고 있는 사탑,짙은 초록의 잔디와 물감을 칠한 듯한 파란 하늘빛은 말할 것도 없고 엄숙했던 미사와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올렸던 양초의 하늘거리는 불빛들과 마치 비둘기처럼 쏟아지는 영혼의 찬송들. 정말 피사는 그림 그 자체였다.
버스를 타고 한참 달려 찾아간 피사의 사탑 앞. 버스엔 우리 말고도 일본여자 4명이 더 타고 있었고, 할머니들과 서양인 배낭족 여자들도 꽤 타고 있었다. 갑자기, 앞에 앉은 할머니들이 한 정류소에서 우르르 내리는 게 보였다. 어디서 내려야 할 지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앞에 앉있던 일본애들도 내렸다. '그래, 일본 여행책은 잘 정리되어 있다더니, 역시 우리 것보다 정확하게 적혀있네.'라며 속으로 생각하며 내릴려고 하고 있었다. 먼저 내린 일본여자들 곁으로 집시로 추정되는 여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고, 이내 일본인들을 에워싸는 게 보였다.
'피사에도 집시가 있구나'라며 내리려고 하는데 집시소녀들의 한 무리는 그녀들 앞에서 구걸을 하는가 싶더니, 뒤에 있던 또 다른 무리들이 그녀들을 에워쌓다. 뒤에서 압박하며 들어가는 집시소녀들의 손에는 예의 두툼한 박스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순간, 황당한 얼굴로 얼쩔 줄 몰라하는 일본 여자들. 그녀들의 당혹스러움엔 아랑곳없이 박스종이로 가려진 집시 소녀들의 손들은 거침없이 가방의 지퍼를 열고, 무언가를 열심히 뒤지며, 닥치는 데로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긴 머리를 풀어헤친 앳된 얼굴의 집시소녀들의 대범함이 섬뜩했다.
앞에선 손을 펼치고 큰 소리로 '한 푼 줍쇼'를 외치며 밀착하여 정신을 교란시킨 다음, 뒤에선 훔치고... 집시들의 교묘한 전술을 이곳 피사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뒤늦게 달려간 내가 집시들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지르고서야 집시들의 대담한 도발에서 겨우 벗어난 일본여자들은 급히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여자들은 혹시 도난당한 것을 일일히 확인하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연발하는 '아리가토'만큼은 잊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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