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 트래킹의 시작


















부다항공을 탔다.
포카라행 비행기를 탈 때는 반드시 오른쪽 좌석에 앉으라고 누군가가 조언을 해 준 기억이 났다.
충실하게 그 조언에 따라 치열한 경쟁 끝에 가장 먼저 비행기에 오를 수 있는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오른쪽 맨 뒷 창가쪽(하긴 여긴 전부 창가가 좌석이었다. 통로쪽 좌석이 없기 때문이다)에 자리를 잡고 비로소 둘러보니
가장 먼저 비행기에 오른 사람들은 한결같이 한국인들이었다.
한국인의 치열한 승부욕은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위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의외로 유리창이 뿌옇다.
이대로는 사진을 찍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욱하고 든다.
게다가, 카트만두 상공을 덮고 있는 짙은 헤이즈 때문에라도 시야는 오히려 더 답답했다.


지상을 벗어나자, 이내 높은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히말라야 산맥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장관이 곧 우리의 시선을 묶어놓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짙은 헤이즈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는데...
봉우리 위로는 파란 하늘이 펼쳐졌고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그 뽀얀 자태를 뽐내며 자랑하는 광경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한국에서 네팔로 들어오는 비행기에서 이미 보긴 했지만 또다시 보는 그 감회는 남달랐다.
그래, 내일이면 아니 모레쯤이면 저 산기슭 어디에선가 저 아름다운 풍경을 육안으로 목도하겠지.
며칠 뒤면 어느 언덕에서 저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조경할 수 있다니 벌써부터 마음이 쏴하게 떨려왔다.


 

 






 

 

포카라의 ‘포카라짱’ 게스트하우스에 미리 연락을 해놓은 터라 그곳에서 마중을 나와줬다.
내일 푼힐 쪽으로 트래킹을 간다고 미리 예약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짐만 풀고 바로 시내로 나올 수 있었다.
카트만두 같은 번잡함은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조용하면서도 안락한 쉼터 같은 도시가 바로 포카라였다.
그저 산책하면서 사색하기 딱 좋을만큼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느린 걸음으로 페와호수 주변을 돌며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 주변을 순찰하던 한 군인을 만났다.

페와 호수 인근에 있는 네팔정부 요인의 별장을 지키던 군인이었다.
“뭘 하고 있어?”라고 묻자 “네팔 가버먼트 오피스'라며 제법 커다란 건물을 가리킨다.

"나도 20년 전에는 너같은 군인이었다."
"정말요?"
군인인 그와의 동질감을 찾다보니, 또 어줍찮은 ‘군대 이야기’부터 시작됐다.
‘어디서 왔냐?’ ‘직업이 뭐냐’ 등 기본적인 것들을 내게 묻기 시작하던 그는 대뜸 내 손목시계를 가리키며 자기 꺼랑 바꾸자고 한다.
비록 10년도 더 된 낡은 등산시계였지만 아내가 생일선물로 준 것이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계였다.
게다가 녀석의 시계는 시간도 제대로 맞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인도제…

"이것 대신 사진 선물을 줄께. 사진 찍어서 바로 뽑아줄까?"

그러자, 녀석이 자꾸 망설인다.

상관이 보면 안된다며 약간 외진 곳으로 나를 이끈다.
그렇게 찍은 녀석의 사진이다.^^;
녀석은 쓰고 있는 군모도 벗고 탄띠까지 제거하고 총도 한쪽에 세워놓은 채 사진을 찍는다.
우리 같았으면 온갖 고난위도의 다양한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을 텐데도 그는 너무 경색되어 있어서 안쓰럽기까지 했다.


 

 





 

 

 

 

볕 좋은 시간은 비행기 안에서 다 보내고 늦은 저녁에 산책 삼아 찾아온 곳이 페와호수였다.
딱히 사진을 찍으러 나간 건 아니었고 그저 산책 삼아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이리 저리 다니다, 우연히 바라보게 된 풍경...
형형색색의 조각배들의 주는 패턴과 빨래하는 아줌마의 묘한 대조가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이미 날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제대로 셔터 스피드가 나올리 만무했다. 꼭 이런 식이었다.
뭔가를 사진으로 담으려면 꼭 여러가지 불안한 요인들이 슬며시 자리를 잡는다.


 

 

 






 




제대로 정열된 패턴이면 좋았을 텐데 솔직히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없는 모양이다.
언제나 그렇듯이...저걸 어떻게 담아야 할까. 그때부터 고민이 싹튼다.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고...
약간 비스듬히도 찍어보고
조금 더 광각으로도 찍어보고 가로로도 찍어보지만 다 그 놈이 그 놈이다.
아...결국 마음에 드는 사진은 한 장도 건지지 못했다.
내 어설픈 내공에 너무  많은 걸 바라는 자체가 모순이었다.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지니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며칠되지 않은 짧은 트래킹 코스지만 그래도 많이 든든하게 먹어놔야 한다는 욕심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소개해 준 한국식당으로 갔다.
오랜만에 돼지불고기에 쇠주 한 잔을 기분좋게 들이키니~ '캬...'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해발고도가 800m인 포카라에선 소주 몇 잔에도 벌써부터 취기가 돈다.
아니, 이건 술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기분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트래킹...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참 많은 대화를 도 형님과 나눈다.

그렇게 포카라의 밤은 깊어갔다.


 

 

 

 

 

 

 

트레킹의 출발지, 나야풀이다.
나야풀은 영어로는 ‘New Bridge’ 즉 ‘새로운 다리’라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래된 다리(Old bridge)라며 개다르(나의 포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너무 낡고 노후화되어 이젠 위험스럽기까지 하단다.
막 '새로운 다리'를 건너간 개다르는 카메라를 향해 한껏 포즈를 취한다.
나야풀은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들머리(입구)인 셈이다.
드디어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시작되려 한다.
비록, 짧은 일정 탓에 푼힐까지 오를 수밖에 없지만 예전부터 꿈꾸어왔던 곳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랜다.



그래, 꼭 한 번 와보고 싶었었다.
그땐 왜 그렇게 이곳엘 오고 싶어 했는지 이젠 기억조차도 희미하지만
어떤 강열한 그리움같이 뜨거운 뭔가가 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 덮힌 하얀 안나푸르나를 먼 곳에서라도 반드시 조망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첫사랑에 대한 목적 없고 무분별한 그리움같이 보고 싶은 열망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들끓었고,
때론 뜨거움으로 가득찬 종교적인 열망이나 믿음처럼 북바쳐 오르기도 했다.
절실하게 어떤 ‘메시아’를 간절히 원하고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의 내 삶은 너무 피폐했고 나는 꽤 지쳐 있었다.


 

 









 

산행을 시작한다는 의미로, 오랜 꿈에 대해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의미로 서로의 사진을  찍는다.
'새로운 다리' 위에서 내게 셔터를 누르시는 도 형님.
아마도 서로의 다짐을 받아내는 자리였을 게다.
그렇게 출발이다.
섣부른 기대감 때문인지 아직은 평지 같은  산길을 걸으면서도 출발은 참 산뜻하다고 생각한다.


 

 

 


 

 

나야풀에서 비레탄티까지는 산책길이라 불리워도 좋을만큼 길이 좋다.
비록 일정은 빠듯하지만 한국적인 트래킹 스타일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잘 알다시피, 우리의 여행 목적은 트래킹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트레킹을 하면서 마주하게 될 네팔리들과 그곳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데 있다.
그러다 보면 걸음은 느릿해질 것이고 트래킹은 더뎌질 게 분명하다.
포터들에게 이런 내용을 미리 전달해 놓았고 그들도 우리의 걸음걸이에 동조하도록 도움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포터들에게 한국인들과 트래킹을 해 본 적이 있는지, 트레킹 스타일이 어떤 지 물어본 적이 있다.

한국인들의 산행 스타일은 좋은 말로 ‘열정’적이란다.
얼마나 빨리 걷는지, 수년동안 포터를 했던 그들조차 따라 잡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마치 빨리 오르기 각축전에 참가한 선수라도 되는 양 걷는 잰 걸음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단다.
오로지 산을 오르는 데만 목적을 둔 그런 트래킹은 내겐 의미가 없다.
나는 네팔리들과 소통하면서 달팽이처럼 천천히 이곳의 풍경을 조망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트래킹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이킹(hiking)에 가까운 산행이 그렇게 시작된다.

 

 

 

 

 

 


여행자를 향해 '나마스테'라며 두 손 모아 인사를 하고 약속처럼 '스윗(사탕)' 또는 '볼펜'을 외치는 아이들.
그렇게 내민 아이들의 손에는 부끄러움이 묻어 있지 않다.
꽤 오래전부터 이런 행위들이 이루어져왔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누렇게 썩은 이빨로 배시시 웃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너무 천연덕스러워 고개를 돌리고 만다.

우리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미군에게 쪼르르 달려가 손을 내밀며 '깃 미 초콜렛'을 외치던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그곳에 있었다.
네팔정부에서는 산골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많은 여행자들이 무분별하게 주는 사탕 때문에 양치질을 거의 하지 않는 산골아이들의 치아건강이  손상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산에 사는 네팔리 여인들의 삶은 꼭 이렇다.
머리끈을 지그시 동여맨 여인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부모들이 일을 하러 간 빈 뜨락엔 아이들만 놀고 있었다.

아...다가오면 안돼, 촛점 맞췄단 말야.
아가야 그대로 있어줘~

낯선 이방인을 향해 시나브로 다가오는 아이. 덕분에 핀이 나가고 말았다.
심도가 얕은 렌즈는 핀을 맞추기가 너무 힘들다.
슬쩍 움직이기만 해도 핀이 나가버린다.
50mm만으로 평생 사진을 찍었던 브레송의 그 결정적인 순간을 잡는 작업은 참으로 고되고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의 형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는 망측스럽게도 고추를 드러내놓고 놀고 있다.^^

제법 멋지게 담아보려고 했는데 이미 외국인이 주는 사탕에 길들여진 아이들이 내 의도따위를 알리가 없다.
녀석도 무언의 기대감을 안고서 점점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제 비레탄티에서 디케둥가까지 가는 길로 접어든다.
이 길도 비교적 완만한 산책길이다.
잘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다보면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마을이 나오기도 하고,
돌담으로 쌓아놓은 논과 밭들이 끝없이 나온다.
뱀처럼 길게 늘어진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밭을 가는 부지런한 농부들의 모습도 간간히 볼 수 있다.
바야흐로 꽃피고 새 우는 봄날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물소에게 물을 먹이는 여인.

 

 





 


 

처음 만난, 치킨맨...

나의 포터였던 개다르와 나는 그들을 일컬어 '치킨맨'이라고 불렀다.
무거운 닭장을 짊어지고 그렇게 이틀동안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면서 험한 산길을 올랐다.
그 삶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뭇 경건해져서 사진 하나 찍기도 미안스러울 정도였다.


 

 
 






 

 

남편은 소를 이용해 밭을 경작하고, 아내는 그 뒤를 따르며 파종을 한다.
어느듯 경작의 계절이 다가왔다.
산길을 오르다보면 소를 이용해서 경작을 하는 사람들을 곧잘 만날 수 있는데
우리의 옛풍경이 이곳에선 여전히 일상인 셈이다.

히말라야 산 얹저리를 개발해서 만든 다랭이 논밭이 즐비한 이 곳.
대를 이어 이들은 험난한 그곳을 오르내리며 쉼없이 경작을 하고 있었다.
등골이 휘도록 일을 해도 척박한 땅에서 나는 경작물은 제 값을 못받기 일쑤였고 그런 가난은 또 대를 이어서 내려왔다.
늘 가난해서 가난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인 이 곳에서 그들의 삶은 늘 거칠고 황량해 보였다.


 

 





 

 

유채꽃이 핀 어느 밭의 전경...
일하는 소들과 한가하게 앉아있는 노인.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가고 있는 모자母子를 찍었다.
아이의 시선이 카메라 장비를 잔뜩 들고 잠시 서 있는 내게로 온통 쏠려있다.


 







 

 

 

개다르에게 '저들이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고레파니(우리가 가는 목적지) 또는 그 이상 갈 것'이라고 한다.
고레파니까지 가는 동안 아니 고레파니에서 다시 나야풀로 내려오는 동안에도 쉼없이 만나게 되는 나귀와 사람들...
참 다양하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 곳이 또 이곳이다.

차량이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운송은 전적으로 사람이나 나귀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람에 의한 화물 수송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규모의 수송은 '마방'이라 일컫는 이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고,
그들은 포카라 등지의 도회에서 물건을 받아서 차량의 접근이 용이치 않은 깊은 산골까지 수송을 전담하고 있다.
그 여정이라는 것도 하루, 이틀의 단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방의 행렬에는 여자와 아이까지 동행하게 된다.

 

 

 











 

 

다시 만나게 되는 치킨맨.

닭들이 꽤 무거운 지 잠시 이동하다 쉬고 이동하다 쉬기를 그들은 반복한다.
우리들의 잦은 촬영 때문에 그들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맞딱뜨리게 되는데 만날 때마다 반가운 웃음을 보여주면서 힘을 다독여 주다보니 그들도 어느새 따라서 웃는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느새 얼굴을 알게 되고 짧은 미소라도 던져주니 힘이 되는 모양이다.

헤어지기 직전에 그들의 힘겨운 고난이 담긴 사진을 건내주니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늘어놓는다.
오히려 고마운 건 우린데도 말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자주 그들을 조우했지만 여전히 무거운 짐을 든 그들 앞에선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삶이 경건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종교도 어떤 삶도 이렇게 경건하진 못했다.
카메라를 든 내가, 그들을 찍고 있는 내가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우리는 단지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그들은 살기 위해 먼 길을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나귀들과 나귀 몰이꾼들...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길 위의 사람들'이다.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허기진 배는 그때그때 불을 태워서 해먹는 모양이다.
나귀들은 흩어져 풀을 뜯기에 여념이 없고 몰이꾼들도 분주하게 늦은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밭에서 일하는 여자들...
아이 하나가 밭까지 따라나와 칭얼대고 있다.
산에서 사는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

 










 

 

 

 

'결코 끝나지 않는 평화와 사랑'의 나라 '네팔'.
(Never End Peace And Love)는 네팔을 풀이한 말이다.

가난하게 살아왔던 이 아름다운 나라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