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 나마스테, 트래킹 중에 만난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은 어디나 똑같은 모양이다.
가게에서 사탕을 한웅큼 산 한 아이가 친구에게 과자를 나눠주는 중이다.
주는 아이는 더 주기 싫은 표정이 역력했고 받는 아이는 하나라도 더 받기 위해 보이지 않는 파워게임을 벌이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어린 시절, 우리의 모습이 꼭 그랬으니 마치 타임머쉰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간 기분이 들었다.


모든 물품이 귀하고 흔하지 않던 시절임에도 왜 그렇게 과자나 사탕같은 달콤함에 대한 유혹은 강렬하게 작용했는지 지금 생각하니 성그런 웃음만 난다.
가진 아이는 마치 전리품을 자랑하듯이 당당하게 친구들 앞에 나섰고, 친구들은 비굴한 굴종으로 아이에게 갖은 아양을 떨어야 했다.
기억하기도 싫은 비굴한 몸짓과 행동들이 이어졌고 그렇게라도 해서 거지처럼 사탕하나를 얻어먹었다.
그때부터 서서히 힘의 역학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세상일이 그렇듯이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가진 자'의 역할은 늘상 상층부에 존재했었다.
씁쓸한 기억들이다.

 

 

 

 

 

 

 

 

 

 

 

 

 

 

 

 

 

 

 

 


 

남자 아이의 강렬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늘이 낮게 내려앉은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인지 그 눈빛 속에선 비애감마저 스며있었다.
때가 끼여 꾀죄죄한 아이의 위태로운 맨발과 허름하고 낡아빠진 옷을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코닦지가 흥건하게 묻어있는 어린 여동생을 꼬옥 데리고 다니면서 내내 우리 주변을 서성거렸다.
일나간 부모를 대신해서 낮시간에는 오빠가 어린 동생을 돌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이내 눈물을 터뜨리는 어린 동생을 위해 오빠는 늘 동생을 보듬고 있었다.


아이에게 사탕 몇 개를 나눠주고 또 몇 장의 사진을 찍어서 인화를 했다.
사진을 받아 쥔 남자아이의 굳어있던 얼굴이 그제서야 도화지마냥 하얗게 피어났다.
그런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내 답답했던 내 가슴도 그제서야 스르르 빗장을 풀고 부드럽게 용해되어 갔다.
지독하리만치 혹독한 가난을 체험해 본 나로서는 그 가난의 무게가 어떤 형태로 삶을 지배하고 있는 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70년 초반, 부산 앞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비탈진 산복도로 위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왔다.
다닥다닥 붙은 하꼬방같은 집들이 제멋대로 정열해 있던 그곳의 가난한 과거의 우리들의 모습과
현재를 살아가는 네팔 아이들의 헐벗은 모습은 유감스럽게도 너무 닮아있었다.
네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떠올리기 싫은 유년의 가난한 기억들이 진절머리나게 내 몸에 달라붙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또다른 슬픔이었다.
단지, 네팔리들이 가난해서 슬프기보다는 가난을 경험해 본 내 감정이 미묘하게도 그런 결과를 낳고 있었다.

 

 

 

 

 

 

 

















 


  
남매에게 사진을 건내줬다는 소문이 겉잡을 없이 퍼진 모양이었다.
온 동네아이들이 꾸역꾸역 우리 곁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네팔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먼저 구매했던 것이 후지에서 나온 MP-300이라는 즉석프린터였다.
폴라로이드 필름을 사용해서 인화를 하는 방식인데 어떤 디지털 카메라와도 연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겐 상당히 유익한 제품이다.

혹시나 싶어서 필름도 넉넉하게 150장 정도를 가져갔기 때문에 왠만큼 아이들이 몰려들어도 그다지 걱정스럽진 않았다.
내가 이렇게 즉석프린터를 준비하게 된 것은 '몽골여행'때의 뼈아픈 경험 때문이었다.
낯선 초원에 사는 사람들의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원했고 단지 번거럽다는 이유 때문에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두고 온 탓에그들에게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사진을 원할 때마다 나는 그저 LCD상에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기껏 보여주는 것으로 생색을 냈으니 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결국 내 자신의 사진에 대한 욕심만 채우고마는 그런 이기주의자, 그게 솔롱고스(한국)에서 온 내 모습으로 비칠 게 분명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두고 온 것을 여행 내내, 아니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안타까워 했음은 물론이다.

 

녀석들을 차례로 세워놓고 한 명씩 증명사진을 찍듯이 찍어나갔다.
포터였던 개다르는 옆에서 아이들을 줄세웠고 내 의도를 아이들에게 네팔어로 조목조목 설명해나갔다.
 입과 코, 볼 주변이 튼데다 며칠동안 씻지도 않았는지 지저분한 얼굴의 아이들의 대부분이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때도 꼭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 때 가끔 그런 생각도 떠올려봤다.
우리는, 이미 지난 과거를 추억하기엔 너무 다른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6,25가 뭔지 보릿고개가 뭔지도 모른 채 불편하고 가난했던 기억들을 애써 망각해왔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풍부한 물질문명이 우리의 머리를 세뇌시키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망울만큼은 너무 맑고 투명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금새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아이들도 사진을 한 장 한 장 받을 때마다 홍조를 띄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들에게 소중한 추억 하나를 선물하는 기분이었다.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하던 그 말의 의미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집짓는 인부들...

근처의 돌들을 날라와서 하나하나 다듬고 깍아서 쌓는 공법인 것 같다.
기초 공사라고 해봐야 땅을 조금 파고 그 위에 몇 개의 나무로 형태를 만든 다음 차곡차곡 돌을 쌓는 아주 간단한 방식이다.
사용되는 재료도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나무가 전부, 결국 돌을 다듬는 인고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집이 완공되는 것 같다.


척박한 땅에서도 여전히 사람은 삶의 끈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집을 짓고 밭을 갈고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도 생겨날테고 이방인들이 볼 수 없는 어떤 즐거움도 생겨나리라.외진 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을 정도다.


 












 

 

 

길가에 나와 있는 집들은 대부분 롯지 또는 레스토랑이라고 보면 된다.
아름다운 꽃들로 외벽을 장식하고 파란 페인트로 화사하게 집을 꾸민 걸 보면 금새 이곳이 롯지라는 걸 알게 된다.
롯지는 트래킹 초반에는 자주 보게 되지만 산을 오르면 오를 수록 빈도가 점점 떨어질 뿐 아니라,
여러 공산품(음료수 등의 먹거리)과 숙박비도 조금씩 올라간다.


 



 

 

 

 



 

 

다랭이밭과 연결된 어느 민가.


밭으로 경작할 수 있는 곳은 전부 밭으로 개간해 놓았다.
다랭이밭은 산 꼭대기까지 주욱 이어지는데 그것을 볼때마다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모퉁이를 돌아서 다리를 건너자 마자 끝없이 올라가는 계단길이 나타난다.
이른바 3천 계단이라는 그야말로 치를 떨게 만드는 마의 계단길이라고 했다.
이 계단 끝부분이 바로 우리가 하루 쉬어갈 롯지가 있는 '울레리'라는 곳.


 

 

 



 

 

 

시간 개념없이 훼를 치며 울고 있는 젊은 수탉

 

 

 

 

 



 



 

 

 

 

 

 

 

 

 

 
이 가파른 계단길을 아무 소리없이 오르는 나귀 군단들...
3천개의 계단길을 맨몸으로 올라가기에도 벅찰 텐데 나귀들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운 화물을 짊어진 채 오르고 있었다.
꽤 많은 짐을 지고도 성큼성큼 올라가는 그 강력한 힘에 한편으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녀석들도 힘에 부대꼈는지 몇 걸음 오를때마다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멈춰서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몰이꾼들의 가혹한 소리가 날라들었다.

그때 보여지던 나귀들의 슬픈 눈망울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말하지 못하는 동물의 눈빛은 그래서 더 슬프게 보였는 지 모른다.

 

 

 




 


 

이 땅에서 가혹한 것이 비단 인간과 나귀 뿐이겠는가.
산녘에 피는 풀 한 포기, 하늘을 배회하는 솔개마저도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혹함을 극복하고 그들의 삶을 터전을 가꾸며 갖은 생존의 위협에도 굿굿하게 살이를 존속하는 과정이 아름다울 수 있다.

3천개의 계단이 이어진 비탈진 둔덕에도 여전히 다랭이 밭은 있었고 그곳에서도 여전히 농사는 이루어졌다.
생존을 향한 인간의 도전은 끝이 없는 듯하다.
이런 산을 개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높은 산까지 나귀를 이용해서 또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도 있다.


생존,
그 엄연한 현실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도회에서는 그냥 무관심으로 일관했을 그 삶의 다양한 형태를 온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모질고 힘든 삶이 굳이 네팔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텐데, 왜 우리는 스스로의 문을 걷어 잠군 채 이웃들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낯선 곳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의 평범하고 낯익은 생활 속에서도 그런 아픔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눈을 감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냥 앞만 바라본 채...
 

 

 





 

























 


 

우리가 묵었던 울레리 롯지의 마당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사우스의 경이로운 순간의 모습이다.
태양이  막 떴을 때는 붉은 빛들이 꼭대기에 잠시 머물면서 놀랍고 환상적인 색감을 연출했다.
게다가, 퍼져가는 구름과 바람에 휩쓸려 가는 눈보라가 불면서  잔뜩 끼여있던 구름이 하나하나 걷히고 안나푸르나 사우스의 속살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육중한 설산의 모습은 또다른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설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아득히 먼 기억 속에 잔재해 있는 설산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작용한 탓이리라.
자신을 되돌아보기 수없이 올랐던 설악산과 지리산의 설산들의 희미한 추억이 문득 그리움처럼 다가왔다.
겉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잠기면서도 희안하리만치 침착하게 셔터를 눌렀다.

가끔씩 줌(400mm)을 당겨서 안나푸르나 사우스의 정상을 잡기도 했다.

혹시나, 새벽 일찍 저곳에 오르는 등정팀이 있으면 볼 수 있을까 하는 치기어린 관심에 불과했다.
희미한 그 흔적들 속에 자신을 투영해보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당겨서 사람을 찾아봐도 아예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저 거대한 봉우리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을 찾는다는 게 애당초 무리였을 테지만 말이다.

내 설익은 희망사항이 만들어낸 우스광스러운 짓이었다.

한참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계속 같은 풍경에만 셔터를 눌렀다.
어느 자연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일출 때의 그 강렬한 빛은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의 풍경으로 돌아오는 듯한 느낌이다.
점차 강렬함은 사라졌지만 8000m급 봉우리가 우리 앞에 턱 버티고 있다는사실만으로도 벅찬 감동일 수밖에 없다.
촬영을 하다 다른 롯지에서도 누군가 사진을 찍는 게 보였다.
앞에 백통 렌즈 달린 것을 봐서는 그도 캐논을 쓰는 모양이었다.
열심히 손각대로 이리저리 이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잠시 카메라를 내려놓고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주저없이 맨 눈으로도 담았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한참동안이나 넋을 잃고 도취되었다.

 

 

 







 

 

 

 

 


우리가 묵었던 롯지의 딸래미.


엊저녁에 우리가 도착해서부터 사진 한 장 찍자고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도 도망다니기 바빴던 그녀였다.
아침식사 후 겨우 찍은 그녀의 사진이지만 여전히 얼굴엔 부끄러움과 어색함이 잔뜩 묻어있다.
컨트라스트마스킹으로 보정했더니, 버짐이 핀 것처럼 되고 말았다.
따뜻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소녀의 부끄러운 미소가 싱그럽다.


 

 

 








 

 

 

 

롯지의 할머니.

연세가 꽤 많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안일을 조금씩 하시는 모습에서 정정함을 엿볼 수 있었다.
아침빛을 받은 할머니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사진을 찍었다.
네팔의 여자들은 생활력이 상당히 강하다고 했다.

물자와 노동력이 귀한 이곳에서는 여자들도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어 모질고 힘겨운 삶을 살아야하는데  원동력은 바로 '여자'라고 했다.
고되고 힘들게 살았을 '여자의 일생'이 할머니에게서 느껴졌다.
고되고 힘듦조차도 운명이라고 여겼을 그녀들의 한 생애가 아스라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는 내내 '던야밧(고맙다)'을 읊조리신다.


 

 

 



 

 

 

 

 

 

울레리 아랫 계곡을 가득 채운 빛줄기들이 어느새 천지에 가득했다.
너무 풍부한 빛줄기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가 이곳에 머물 때의 날씨는 꼭 이랬다.
오전엔 강한 햇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다가도 오후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먹구름이 잔뜩 끼기 일쑤였다.
강한 햇살 때문에 기온이 상승했고 금새 더위 때문에 물을 들이키며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할 지경이었다.

그럴 때면 가방 깊숙한 곳에서 짧은 반바지를 꺼내입고 산을 오르기도 했는데 뒤에 따로 오던 개다르는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롯지 바로 옆집 아이들...

학교 가는 아이들을 불러 세우고서는 사진을 찍었다.
녀석들에겐 사탕(sweet)까지 하나씩 건내주며 어렵사리 허락을 맡았다.
당돌하게 표정을 잡은 녀석들.
하얗게 버짐 핀 얼굴을 보니 딱 우리의 어릴 적 그 모습이었다.


 

 


  

 


 

 




 

 

 

롯지의 안주인.

즉석에서 사진을 뽑아줄 수 있는 즉석프린터를 가진 매력 탓인지다행스럽게 누구 한 사람도  내 카메라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내가 추억을 담아주는 행복한 사진사가 된 것이었다.
그것만을도 나는 즐거웠고 행복했다.

 












 


 

아련한 유년의 추억같이 잠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히 내 정신의 한 켠에 곱게 자리하고 있었다.
엄마 품에 안겨자는 그 아이의 따뜻하고 기분좋은 느낌 때문이었을까.
환하게 빗살이 번지는 아침의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몽롱한 얼굴로 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절묘한 추억에 잠겨 있었다.

네팔여행은 어쩌면 추억을 담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샘솟는 추억의 물결들이 어느새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추억은 그렇게 지독한 그리움으로 내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