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 카트만두의 새벽시장 아산초크를 가다




 


         
네팔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인데도 눈이 번쩍 떠졌다.
한국과는 3시간 정도의 시차가 나는데다 오랜 비행 시간 때문에 몸은 꽤 피곤한데도 여행지에서의 기대감은 나를 들뜨게 했다.
낮에도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호텔방이라 그런지, 방안의 새벽 공기는 사뭇 차가웠다.
도 형님은 모포를 둘둘말아 뱀처럼 또아리를 뜬 채 새벽잠에 취해 계셨고,
그나마 두툼한 오리털 침낭에서 잠을 잤던 나는 가벼운 설레임과 기대로 인해 빨리 일어났다.

이럴 땐 몸 시계가 알람보다도 더 정확하고 예민하다.
1시간 정도의 비행기 연착에다 '마오'들의 길거리 시위로 인한 교통정체 등으로 전날의 일과는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냥 피곤했고 잠시라도 몸을 누이고 싶은 욕심만 가득할 뿐이었다.
'네팔짱'이라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소개시켜 준 작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해거름이 지는 타멜거리를 잠시 배회했을 뿐이었다.

트레킹 도중 사용할 헤드렌턴을 구입하고  작은 식당에서 네팔의 정식이라는 '달밧'과 맥주 한 병을 성의없이 먹었고
쓰레기가 잔뜩 쌓여있던 길가의 지독한 악취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아쉬운 첫날이 첫날이 그렇게 허무하게 흘러 갔고 어느새 이튿쨋 날이 밝았다.


사실은 네팔에서의 첫날이기도 했다.   
오래되고 낡은 호텔이라 그런지 한참을 기다려도 온수조차 나오질 않는다.
네팔의 열악한 상황은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첫날부터 이런 상황을 맞닥드리게 되다니 솔직히 당황스럽다.
아직 내 몸은 네팔에 적응되어 있지 않은데다 어떻게라도 성그런 몸을 녹이고 싶은 욕심 뿐이었다.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도 한참이나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뜨거운 물이 나왔다.
비록 누런 녹물이 섞여나오긴 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되었다. 그나마 더운 물에 샤워를 하니 간밤의 피곤이 말끔히 물러간다.
여행이 시작된다는 기분좋은 설레임처럼 뜨거운 물에 용해되는 개운함이 온몸으로 번져가며 따뜻한 기운을 선사한다.                    


장비를 챙겼다.
바디에 50mm f 1.8 렌즈만 마운팅한 채  나머지 렌즈들은 두툼한 가방 안으로 밀어넣었다.
타멜거리 인근에 유명한 재래시장이 있다는 애기를 들었었고 여행 오기 전부터 이곳만큼은 꼭 첫 행선지로 갈 것이라고 계획을 세워둔 터였다.

흔히들 아산초크를 보지 않고서는 카트만두의 아침을 봤다고 애기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탓에 아산초크에 대한 기대는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다. 현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시장이니만큼 볼거리도 먹거리도 꽤나 풍성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과 함께 일어나는 기대감이 설렁거리며 일었다.  
제대로 방향감각조차 서지 않은 이 새벽에 우리의 첫 행선지를 아산초크로 잡은 건 카트만두 사람들의 분주한 삶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도형님을 깨워 샤워장으로 보내고도 남은 뒷정리를 서둘러 마쳤다.

      
삶을 느끼고 싶었다.
우리와는 다르게 살아갈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할 수 없어서 아직 피곤에 절어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거리는 지저분했지만 기분만큼은 상쾌했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거리를 들뜬 기분으로 걸었다.
가다가 길을 잃으면 아무에게나 다가가 단지 '아산초크'라고 물었고 그럴때면 그들은 손을 뻗어 길을 가르켜 줬다.

        
네팔인들에 대한 첫인상은 한결같이 친절하고 따뜻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도둑놈도 사기꾼도 섞여있겠지만 표면적으로 접하는 그들은 한결같이 따뜻한 마음을 지닌 듯 친절했다.
가공되지 않는 웃음을 보여주며 우리의 손을 이끌고는 길을 가르켜주었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마스테'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왠지 네팔이라는 나라에 정감이 가기 시작했다.



카트만두의 새벽 풍경은 여느 한국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아직 동도 트기 전의 새벽인데도 어디론가 분주하게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매웠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때문에 비록 어둠이 여전히 사방에 깔려 있지만 지독한 낯설음은 덜 한 편이었다..      
어느샌가 나타나서 호객행위를 하는 릭샤꾼의 고함소리가 있는가 하면 세면도 하기 전에 앞 마당부터 쓰는 부지런한 아낙들도 보였고 난전에 차곡차곡 팔 물건들을 쌓아가는 부지런한 상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어두운 집집마다 매캐한 향이 나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낯선 거리의 새벽 풍경이지만 기대에 들뜬 우리는 마치 용감한 전사처럼 새벽길을 재촉했다.
                   

 





 

 

 





새벽부터 대면하게 되는 안타까운 노동의 현장이다.
이곳에서는 아이도, 여자도 그리고 남자도 같은 짐꾼일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아야 하는 그들 살이의 고단함과 억척스러운 단면을 엿보는 순간이었다.
어찌보면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달리 보면 일이 있어 오히려 행복한 그들인지도 모른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이 없어 못하는 사람들이 네팔에는 너무도 많다고 한다.
삶의 짐이 아무리 무겁다 하더라도 이 새벽만큼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길 빌어본다.


동트기 전의 새벽의 어둠 속이라 그런 지 핀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 iso를 1,600까지 주고 조리개값을 f 2.2 정도로 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들의 잰걸음 때문에 금새 포커싱이 어긋나고 만다. 아이에게 핀을 맞췄는데 오히려 뒤쪽에 오는 아낙에게 핀이 맞춰져 있다.

 

 


 


 

 

 

 

 

시장 모서리에 있는 힌두 사원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입구 쪽에 쪼그려 앉아 내내 그들의 의식을 지켜보며 카메라에 담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참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드리면서 작은 예식을 올리고 있었다.
짧은 기도와 기원, 지난 밤 묵은 체증을 털어내 듯 정화하는 그 짧은 과정이 이방인의 눈엔 신기하기만 했다.
종교가 그들의 생활이고 삶인 네팔에선 너무나 흔한 광경이겠지만 첫날의 내게는 그저 낯설고 신기한 의식이었다.





 

 

 

 

 

 

 

 

 

 

 

 

 

 

 

 

 

 

 

 

 


 



사원 주변은 꽃을 파는 많은 상인들로 북적였다.
제법 큰 꽃가게도 있지만 난전을 펼쳐놓고 몇 송이의 꽃들을 갖춰놓은 소상인들이 대부분이다.
초라한 꽃 몇송이와 상추 몇 단이 고작이지만 흥정은 이어졌고 삶은 지속되었다.
지리한 새벽의 한기와 추위에 지치긴 했어도 여전히 그들에겐 생기있는 몸짓과 표정들이 있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고 싶다고 암묵적인 동의를 구한다.
한참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작은 소상인들에게 접근하는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그들은 측은해진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몇 컷의 사진을 찍어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이 담긴 LCD를 보여주자 굳은 얼굴이 배꽃같이 부끄럽게 피었났다. 오래전 잊혀졌던 70년대의 어느 장터에서나 봐왔을 법한 그런 풍경들이 번뜩 떠올랐다.


쪼그려 앉아 손님을 기다리지만, 작은 난전은 장사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녹녹치 않은 인생살이이지만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고 밝음 속에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가슴은 여전히 뜨거울 것이다.

 

 





 

 

 

 

 

 

사원 앞에 켜놓은 작은 성화 앞에서 지난 밤 켜켜히 쌓였을 한기를 털어내는 길거리 아이들을 만났다.
남루한 옷가지에 꽤 오랫동안  씻지 않았을 꾀죄죄한 얼굴과 기름끼로 푸석해진 머릿카락. 가난이 버짐처럼 듬성듬성 묻어났다.
오래전 캄보디아 여행 때도 이런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새벽이면 길 한 켠에 박스를 깔고 자던 아이들은 새벽이면 부시시하게 일어나서는 길가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우리같은 여행자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냉큼 달려와 손을 벌렸고 어김없이 '1달러'를 외쳐대던 그 큰 눈의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면 늘 가슴 한 켠이 쓰리고 아파왔다.

우리가 올때부터 짖기 시작하더니 우리가 자리를 뜰 때까지 내내 짖으며 위협을 가하는 그 옆의 개가 더 문제였다.
조금 더 다가가서 사원에 기도드리는 사람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는데 한사코 녀석은 그런 우릴 방해했다.
마치 사원과 아산초크의 수호자라도 되는 양 위세를 떠는 통에 감히 근접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우리에겐 너무 성가시고 부담스러운 존재였지만 나름대로 녀석에겐 어떤 이유가 있었으리라.




 

 

 

 








 

사납게 짖는 개 때문이라도 잠시 아산초크를 벗어나기로 했다.
막 벗어나려는데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짐든 아저씨를 만났다.
소쿠리 가득 짐을 들었음에도 어찌나 빠르던지 또 초점을 놓치고 말았다.



 

 

 

 

 






 

 

 

네팔엔 거리거리마다 작은 사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길 건너 편에 있는 또다른 사원 앞에서는 한 아주머니가 열심히 각 대마다 기름을 붓고 심지를 두르고 계신다.
성그런 아스팔트를 맨발로 다니면서 몸에 배인 듯 익숙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벽에 기댄 나를 향해 살짝 웃으시더니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아마도 이 일은 아침마다 하는 그녀의 지극히 상투적인 일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각 대롱마다 기름을 붓고 심지르를 두르더니 다시  각 대롱마다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익숙하지만 경건함이 배여있다.
그 경건함 앞에서 그저 말을 죽인 채 지켜보기만 했다

 

 

 




 

 

분주한 카트만두의 아침 풍경이다.
연신 울려대는 자동차의 클랙션 소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서스럼없이 무단횡단을 자행했다.
육교를 통해 지나가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분주하게 발걸음을 놀리면서도 네팔리(네팔사람)들은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보며 지나갔다.
커다란 카메라에 두툼한 카메라 가방을 들고서 새벽부터 이리저리 쏘다니는 이방인들이 낯설게 보였나 보다.

 








인도와 네팔 등지에서 가장 흔하게 마실 수 있는 차가 바로 '짜이'라는 차를 근처의 가게에서 마셨더니 그나마 속이 따뜻해졌다.
우리 앞에는 한 남자가 가득 짐을 둘러매고는 아산초크로 가고 있었다.
어깨에 짊어진 그  무게만큼이나 일반 네팔리들의 삶은 무겁다고 했다.
경제를 외면한 거만하고 부패한 네팔의 관료들 때문에 대부분의 네팔리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아산초크의 그 사원 앞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컹컹'대며 짖는 사원의 지킴이 개는 우리를 반갑지 않게 홀대했고 여전히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로 사원 앞은 북새통이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한치 틈도 없이 다닥다닥 붙은 장사꾼들로 인해 아까보다도 더 붐비는 것 같았다.
뭔가를 사기 위해 오는 사람들보다는 뭔가를 팔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과 릭사꾼이 끄는 자전거 수레와, 오토바이와 자동차들이 마구 뒤엉켜 있는 아산초크.
복잡한 혼란과 악다구니 속에도 보이지 않는 질서는 존재하는지  용하게도  실타래처럼 얽힌 복잡함이 그래도 슬슬 잘 풀리는 듯 했다.
그래서 더 재미있는 아산초크인지도 모른다. 


 

 

 

 

 

 


나를 향해,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내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해주시는 영감님.
그래, 그때 나는 MP-300라는 폴라로이드처럼 출력할 수 있는 즉석 프린터를 가지고 있었다.
찍은 자리에서 바로 인화해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이번 네팔여행을 위해 구매를 했던 터였다.
지난 몽골여행에서 사진을 원하는 많은 몽골인들에게 사진을 찍어놓고 사진을 바로 줄 수 없었던 아쉬운 경험 때문에,
여행 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인터넷에서 구매를 했었고 앞으로 어느 곳에 여행을 가더라도 이 놈만큼은 꼭 들고 다니리라 마음 먹었었다.
네팔여행이 바로 MP-300이라는 폴라로이드 프린터를 처음 들고 갔던 여행이었다.

디지털 사진여행자를 위한 필수장비(포스팅 참조)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던 길에 그야말로 상인들에게 붙잡혀(?) 사진을 찍어주는 신세가 되었다.
즉석 프린터로 사진을 찍어주고 바로 인화해서 건내자 사람들의 관심이 내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시장의 다른 장사꾼들조차 물건을 팽개치고 내게로 몰려들었고 자신을 찍어달라며 부탁을 했다.
자신이 찍힌 사진을 갖고 싶다는 것이 요지였던 셈.
말은 통하진 않았지만 충실하게 사진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신의 장사와 연관된 모션을 취해 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단 얼굴이 큼지막하게 나온 사진을 더 선호했다.
비록 작은 사진 한 장이지만 즉석에서 사진을 받을 수 있다는 신기로움과 즐거움이 넘쳐나는 아침이었다.
자신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며 활짝 웃는 사람들...
그들에게 내가 다가갈 수 있고 그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 비로소 생겨난 것이다.
그건 내게도 큰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다.

 


 

 



 

 

사원 앞의 사람들. 공업시설이 거의 전무한 네팔에선 이렇게 짐꾼처럼 버거운 일을 기다리는 남자들이 많다.
새벽부터 시장에 나와 불러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냥 서성대는 남자들...
그들에게서 가난과 삶의 고달픔을 엿볼 수 있었다.

 

 

 

 

 

 

40~50네팔 루피 정도면 인근은 어디라도 가는 릭샤꾼들.
그들의 여린 몸뚱아리가 안타까워서 도저히 탈 수가 없었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늙기도 서러운데 짐조차 드실까...

 

 

 

 


 
 

 


도 형님은 거금 100루피를 주고 릭샤를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떠나셨다.
(원래 가격은 보통 40루피 정도로 형성되어 있단다. US $1=68 네팔루피 정도. 100루피라고 해도 우리돈으로 천원 약간 더 되는 작은 돈이다.)
같이 타자고 했지만 릭샤꾼의 작고 야윈 몸뚱아리를 보니 도저히 탈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작은 골목 너머로  형님을 태운 자전거 릭샤가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걷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무작정 걸어가는데, 뭔가가 이상하다.

 
이쪽인가 싶어 걸어가보면 낯설고, 저쪽인가 싶어 또 걸어가보면 또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분명히 아까 온 길을 되돌아 그대로 걸어 온 것 같은데 어느새 낯선 골목의 한중간에 덜렁 혼자 놓여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듯 했다.      
벌써 몇 바퀴째 돌고 있었지만 도통 어디가 어딘지 감조차 잡을 수 없다.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지도를 펼쳐 보이며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었지만 '네팔짱(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눠준 한글 지도를 전혀 이해 못하는 현지인들.
하긴 내가 훑어봐도 너무 빽빽하게 적혀져 있어 난해하기만 한데  하물며 낯선 한글 지도를 보는 현지인들은 어땠을까,
하나같이 도리질을 치며 지나쳐 버린다.  약간은 서운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스스로 타개해야 한다.

        
이번엔 가이드북을 뒤적여 작은 지도를 찾아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눠 준 지도와 비교하면서 살피는데,  방위와 건물의 위치 등이 확연하게 틀려서 오히려 더 헷갈렸다.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진 셈이다.
그렇다고 전혀 당황스럽거나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가다보면 이정표가 나오리라는 일말의 기대감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든든한 후원군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학교 가는 아이들, 장사하는 사람들, 지나치는 차량들로도  놓칠 수 없는 재미있는 거리 풍경이 가득하니, 있는 그대로를 즐겨도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골목 모퉁이를 돌자 유명한 '티벳 게스트하우스'가 보였다. 
한글 지도 어디 쯤엔가 표시되어 있던 '티벳 게스트하우스'.
그곳을 기준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금새 타멜거리가 나온다.

가만 살펴보니 일대를 뱅뱅 돈 셈이다.
지독한 방향치인 나는 늘 이런 식이다. 워낙 길을 잘 잃어버리는 통에  왠만해선 어떤 동요도,  당황조차도 하지 않은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낯선 곳에 홀로 던져줬다는 팽팽한 긴장감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셈이다.
여행자 본연의 신분으로 돌아왔다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길 잃어도 겁 날 게 없는 진짜 여행자...!

한국인 게스트 하우스인 '네팔짱'에서 간단하게 라면과 밥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포카라행 비행기를 타려면 오전 4시간의 짧은 여유밖에 없다. 
서둘러야 한다.          
목적지는 화장터로 유명한 '파슈파티나트 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