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동티벳 여행의 슬픈 프롤로그








 

카쉬카르의 구시가지에서 만난 위구르인 남매










 

티벳인들의 가슴 속엔 저마다 간절한 소망 하나가 걸려있다.  @ 중국 스촨성 랑무스









 

어디선가 콩볶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우두둑거리며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소리이긴 했지만  실탄을 사용한 사격훈련 중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라블랑스(拉卜楞寺)의 경계에 위치한 노마드 레스토랑에서 내려다 본 샤허(夏河)의 거리에서 잔뜩 무장한 중국군을 실은 버스 행렬을 몇 번이나 봐 온 탓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나를 휘감았다.


철모를 눌러쓴 젊은 중국군인들의 예사롭지 않은 눈매와 코라를 돌며 열심히 마니차를 돌리고 있는 늙은 티벳 남자의 슬픈 눈빛이 끊임없이 교차되어 오버랩되었다.
총소리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다가 다시 이어졌고, 티벳인들과 같이 코라를 돌 때까지도 여전히 총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작은 긴장감이 머릿속을 팽팽하게 수축해 왔지만 정작 이곳 사람들은 일상의 한 부분이라도 되는 양 미동도 없이 낮선 이방인에게 미소를 날려주었다.



낮은 구름이 하늘을 덮은 샤허의 저녁, 훈련을 마친 점령군들이 장갑차를 앞세우며 의기양양하게 시내로 들어오는 게 눈에 띄였다.

한낱 중국의 일개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막연했던 티벳인들의  슬픈 역사가 그렇게 현실이 되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샤허로 들어오는 길은, 작년 3월의 티벳독립시위 이후 계속해서 외국인들에게 불허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기 얼마 전인 6월 28일에야 비로소 외국인들에게도 개방되기는 했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란조우의 버스터미널 매표소에서는 외국인에겐 표를 팔 수 없다면서 난색을 표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어쩔 수 없이 란조우에서 린샤를 거쳐 샤허로 들어갈 택시를 잡았고 나처럼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던 미국인 에디와 동행이 될 수 있었다.


그 전 날도 프랑스인 여행자 2명이 택시를 타고 샤허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샤허의 호텔에 전화를 걸어 외국인들의 투숙이 허용되었다는 정보까지 입수했기 때문에 추방에 대한 불안함은 한결 덜 수 있었다.
노란 유채꽃이 활짝 피어있는 유채밭들이 먼저 시선을 끌었지만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금새 사나운 빗줄기라도 쏟아낼 듯이 음험했다.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진 탓인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닭살같이 피부가 두드러졌고 무표정한 티벳인들은 라블랑스 외곽의 코라를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중국이 무력으로 이곳을 점령하기 전만 해도 이곳은 티벳의 암도지방(현재 중국의 칭하이성靑海省 일대)에 속하는 곳이었다.
칭하이성과 간쑤성(감숙성 甘肅省)의 경계에 있는 2,920m의 작은 마을인 샤허를 가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겔룩파의 6대 사원 중의 하나인 라블랑스가 있기 때문이다.


티벳인들의 지리 개념으로는 암도(Amdo)지방의 동단에 속하는 이곳은 전체 인구비율의 80%가 티벳 장족藏族으로 2008년 3월 14일 티벳독립시위가 벌어졌을 때에도 그 중심에 있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일대인 감숙성 감남 장족자치구와 사천성 아바 장족자치구는 외국인들의 접근을 차단시킨 채 여행제한지역으로 묶이고 말았다.

 








 

 

 

 

 

 

 

타스쿠르간의 석두성에서 바라본 초원과 무스타커봉

 

 

 

 

 

 

 

내가 우루무치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곳은 사천성과 감숙성의 경계에 위치한 유명한 티벳사원인 랑무스(朗木寺)에 있을 때였다.
구름이 낮게 드리운 천장대에서 새벽시간을 보내고 막 루얼까이(若爾蓋) 초원으로 가기위해 예약해놓은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급한 문자가 날아들었다.
우루무치에서 위그르인들의 독립시위가 일어났는데 중국군의 발포로 인해 3~4명이 죽었다는 간단한 내용이었다.


루얼까이 초원을 다녀와서 다시 느린 인터넷으로 확인 해보니 사망자만 해도 150명이 넘는 대규모의 사태로 일파만파 번져가고 있었다.
사태의 여파는 우루무치를 넘어서 위그르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카스까지 번지고 있으며 신장일대는 국제전화는 물론 인터넷까지 차단되어 있는데다, 우루무치는 준게엄상태로 수많은 중국군들이 진주해 있다고는 하지만 산발적인 시위는 여전히 시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야간통행금지는 물론, 거리 곳곳에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다 불안감을 더욱 조장시킨 것은 한국영사관에서 날아온 위험을 알리는 몇 통의 문자 메시지들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루무치로 거쳐 가야하는 내 입장에서는 어떤 결정도 쉽게 내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니 중국에서의 내 거취 쯤이야 어떻게든 알아보면 되겠지만 벌써 오가며 두 차례나 들렀던 우루무치에서 그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 아팠다.
어쩌면 거리에서 나와 마주쳤을 지도 모를 선량한 웃음을 가진 위그르인들이 뜨거운 여름날의 포도 위에 붉은 선혈을 뿌렸을 것을 생각하니  명치끝이 꽉 막히는 듯한 절정의 답답함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샤허에서 들었던 낯선 총성들과 장갑차를 앞세우며 마치 시위하듯 진주하던 거만한 점령군의 눈빛들이 그제서야 되살아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우루무치 시내는 중무장한 수많은 군경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삼엄하게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무장한 군인과 경찰을 태운 군용트럭이 우루무치 시내를 돌면서 끊임없이 시위 가담자에 대한 투항 권고 방송을 강경하게 내보냈고,공원이며 광장에는 대테러 훈련을 받는 군인들의 함성소리로 가득했다.

숙소가 위치한 곳이 한족 거주 지역이라 그런지 급속도로 일상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지만 여전히 시위가 격렬했던 중심지는 원천봉쇄되어 있었고 국제전화는 물론 인터넷까지 완전히 끊겨 있었다.
CCTV에서는 피를 흘리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한족들의 인터뷰 장면과 과격한 몸짓으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위그르인들의 모습만을 끊임없이 내보냈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내 입장에서 봤을 때도 중국 정부의 교묘하고 의도적인 편파성은 충분히 드러난 셈이었다.
하얀 눈을 소복히 머리에 두른 텐산산맥(天山山脈)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청명한 날이라는 게 오히려 부담이 될 정도였다.
중국군의 강압에 의해서 시위는 멈췄지만 위구르인들의 독립을 향한 정신만큼은 꼭 그만큼 더 높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었다.

이번 우루무치 시위는 중국내에서 1989년 텐안문 사건 이후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시위라고 한다.

...

 





 

 

이제 본격적으로 지난 중국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과연 지난 한 달 동안의 내 중국여행은 어땠을까를 돌이켜보면서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한 사실입니다.
수없이 찍은 사진 보정만으로도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내 여행은... 아니 적어도 내가 겪었던 여행에 대한 생각들을 어설픈 글로써 표현하기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볼품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선선의 쿠무타크 사막에서

 

 

 

 

 

 

 

 

투르판 인근 도로변에 있던 하미과를 팔던 가게에서...

 

 

 

 

 

 

 

 

 

굼타흐 인근의 키르키즈인 할머니

 

 

 

 

 

 

 

 

 

 

 

우루무치 중심지에서....

 

 

 

 

 

 

 

 

 

 

 

 

천산산맥을 넘어가는 고개마루에서 양을 잡는 카자크족 남자와 사진을 찍는 일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