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 5,320m의 고개를 넘어 판공초로~










판공초 호수(Lake Pangong Tso)로 가는 날이었다.

'초'라는 말은 티벳어로 '호수'를 의미한다.
판공초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염호라고 하는데, 그 길이만 해도 154km에 달한다.
게다가 4,000m가 훨씬 넘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해발 5,320m의 창 라Chang La고개를 넘어야 한다.
창 라 고개는 세계에서 세번째로 높은 자동차 도로이고, 그 주변의 풍경이 아주 아름답다.


 

 

 

 

 

막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하늘은 파랬다.
들뜬 여행의 느낌처럼 차창 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본다는 건 행운과도 같은 것이다.
며칠동안 구름이 많이 끼인 흐린 날씨가 계속됐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을 했었는데, 괜한 기우였나 싶다.

레에서 판공초까지의 소요시간은 대략 5~6시간 정도.
그곳까진 대중교통 수단이 다니지 않기 때문에 짚차를 임대해야 한다. 1인당 1,000루피(한화로 25,000원) 정도.
게다가 중국국경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100루피의 퍼미션 피를 더 낸다.
판공초 호수 자체가 자연 국경인 셈이다.


총 154km 중에 인도령은 134km, 나머지는 중국령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중국령이라기보다는 티벳령.


 

 

 

 

 


그나마 평지를 달리던 짚차는 어느새 고개를 버겁게 오르고 있었다.

고개 아래로 펼쳐진 작은 평원.
그 작은 골짜기에도 밭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생존을 위해 이곳 사람들은, 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나 저렇게 밭을 만들어 놓았다.
자연과 인간의 공생...



 


 

 

 

 

 


구절양장 [九折羊腸]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끊어질 듯 이어진 길은 그렇게 계속되었다.
일렬로 느릿하게 오르는 짚들의 행렬.
내려다 보면, 깍아지른 절벽이 아득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예전엔 사고가 났는지, 절벽의 중간 즈음엔 추락하던 트럭의 잔해가 공룡의 뼈조각처럼 앙상하게 걸려있었다.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드디어 겨울과 봄의 접경지대로 들어섰다.
어느 군부대 근처의 산에서부터 겨울은 여전히 지속된 채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황량하던 바깥 풍경이 갑자기 냉냉해진 듯 얼어붙었다.
여름 샌들 위에 양말 하나를 걸쳐 신긴 했지만, 날카로운 눈의 감촉이 벌써부터 발끝에 와닿는 것 같아 싸늘했다.

 


 

 

 

 

 


어느새 구름마저 겨울과 봄의 경계 사이를 오갔다.

구불구불한 그 능선길을 따라 안개처럼 구름이 피어나는 게 보였다.
짚차는 느린 속도로 미끄러운 눈길 위로 한 발 한 발 내디뎠고,
창밖의 달라진 풍경 때문에 일행들은 내내 눈길을 떼지 못했다.

 

 

 

 

 


홀랜드[네덜란드]에서 왔다는 젊은 커플과 인도의 꼴까따에서 온 지란집.

그리고, 나와 운전사 이렇게 총 5명이 오늘 여행을 함께 할 일행이다.
홀랜드 남자는 '혹시 히딩크를 아느냐'고 물었고, 나는 '앱서룰리[absolutely]'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국에서는 영웅이다.[He is a hero in Korea]'라고 그를 소개했더니,
키 큰 홀란드 남자는 사람 좋아보이는 호탕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어느새 하늘의 영역으로 들어와 버린 모양이었다.

구름 속을 느릿하게 달리는 짚차들의 행렬.

구름 때문에 시계는 좋지 않았지만, 구름과 눈 그리고 바람으로 인해 자연의 일부가 된 듯 했다.
벼랑 아래를 내려다 봐도, 하늘 위를 올려다 봐도 온통 자욱한 구름들...
마치 신선이 산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착각도 불러 일으켰다.

이 황량하고 척박한 곳에서 신선이라니...
금방 한 내 생각이 어색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지난 밤 내린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웠다.

앞서서 달리던 차들은 가다 서기를 반복했는데,
가끔 '쎙'하는 굉음을 내면서 헛바퀴가 돌 때는 섬뜩한 느낌까지 들 지경이었다.

그래도, 운전사들은 오랜 경험 탓인지 그 험난한 고갯길을 잘도 올라갔다.
비록, 가다 서야하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반복의 연속 선상이지만, 일단 그들을 믿기로 했다.
눈길 위에 마른 흙을 덮고, 겨우 몇 십 m 올라가다가 또 짚들은 일제히 멈춰섰다.
눈을 자주 못보는 인도인들은 그럴 때마다 짚에서 내려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위험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마치 때 만난 철부지들처럼 눈을 뭉쳐 놀거나, 쌍쌍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니, 남부 인도의 어딘가에서 왔다고 한다.
제대로 된 놀이꺼리를 만난 듯한 그들은 마치 아이처럼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탕체까지는 39km,
판공초까지는 69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이 보였다.

험준하고 위험스럽기까지 한 고갯길 69km.

단지 머릿속에서 상상되는 그 거리는 어마어마해서 오늘 내로 도착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득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창 라 고개(해발 5,320m)까지 올라오는데만도 꽤 많은 소요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내리막길 어쩌면 더 위험해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섶다.

어쨌거나, 그렇게 창 라 고개까지 무사히 도착하긴 했다.
하지만, 너무 거센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사진을 찍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눈밭을 휘젓고 다니면  서슴없이 양말 속으로 침투하는 그 성그런 눈물들...
이건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6월에 맞는 설경은 그야말로 색다른 느낌이었다.



 

 

 

 

 

 

구름도, 바람도 쉬어갈 것 같은 창 라 고개...

해발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숨쉬기도 쉽지 않았다.
오르막을 오를 때부터 조금씩 머리 한 켠을 옥죄어 오던 두통의 압박은 최고조로 올랐다.
얇은 옷으로 인해 금방 추위에 노출되고 마는 여린 몸뚱아리.
잠시동안 서성이며 사진을 찍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고갯마루라서 그런지 바람이 거센데다,
계곡쪽에서 밀려오는 거센 눈발 때문에 앞을 보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기 풀린 듯한 인도 군인들이 앉아있는 저곳을 지나면 작은 움막이 나왔다.
바람과 추위를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었는데 이를테면 휴게소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
게다가, 약간의 성의(대략 10루피 정도)만 표시하면 따뜻한 짜이까지 마실 수 있으니 더 없이 좋다.

입김으로 '후후' 불면서 짜이 한 잔을 따뜻하게 비웠다.

우리를 따라 들어온 인도군인이 대뜸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여기선 내가 어디서 왔는지 꽤나 궁금한지 어딜 가나 그 질문은 꼭 따라붙는다.

"네팔~!"

농담처럼 그렇게 말하자 인도군인이 껄껄 웃었다.


 

 

 

 

 


어느새 날이 많이 흐려졌다.

새벽에 떠날 때만 해도 제법 운치있는 파란하늘과 뭉게구름 때문에 꽤나 흥분했는데,
구비구비 산길을 돌고 돌아, 고갯길을 넘어서니 하늘은 얄궃게 흐려져 있었다.
게다가 뿌연 연무 때문에 시계마저 뚝 떨어졌으니 풍경 사진을 멋지게 담으려던 내 계획은 보기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흐린 하늘과 좋지 않은 시계...

그렇다고 해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아쉬움을 남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평생 한 번 올까 말까한 이런 척박한 땅에서 제대로 된 사진을 가져 보지 못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휘감겼다.

사진, 어쩌면 이것도 병이다.

 

 

 

 

 

 

 

 






 

 


 

판공초로 가는 길목인 창라고개(해발 5,320m) 너머...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탓에 찬바람만 황량하게 불어오던 그 곳.

풀 한 포기 없을 정도로 삭막해서 사람의 흔적이라곤 없을 줄 알았던 그 곳.
공기가 희박해서 잠시만 걸어도 하늘이 노랗게 변하던 그곳에서...
비탈진 언덕을 넘어 몇 마리의 야크를 몰고 가는 한 아이를 만난다.


달려간 이방인의 낯선 시선 때문인지 아이는 잔뜩 긴장을 한다.

며칠동안 고산증으로 고생하다 이제 겨우 진정되었다 싶었는데, 가뿐 숨을 고르고 있자니, 하늘이 삥 돈다.
그 와중에도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몇 컷을 날린다.
아이의 표정이 꽤 굳어 있다. 경험하지 못했으니 어색할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 LCD를 보여 주자, 그제서야 신기한 듯 해맑게 웃는 아이...
오지에 사는 아이답게 천연의 미소를 가지고 있다.


때가 꼬질꼬질 묻은 옷가지와

태양과 거친 바람으로 인해 까맣게 타버린 여린 피부...
삶에 대한 질퍽한 애잔함이 밀려오지만, 그건 단지 내 감상일 지도 모른다.
늘 외양으로 모든 걸 판단하려 들고 늘 문명의 눈으로 이곳 사람들을 바라보려는 못된 버릇과 선입견을 갖고 있다.
나름대로 삶의 가치가 있을 테고, 행복의 잣대가 있을 텐데 말이다.
살이가 궁핍해 보인다고 해서, 그게 곧 불행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아이에게 사진을 출력해 주려고 보니, 프린터를 차 안에 두고 온 모양이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꼭 출력해주고 싶어서 가지고 온 장비였는데...
비록 지척에 차가 있긴 하지만 그곳까지 가기에도 호흡이 너무 가쁜데다
여름옷과 샌들만 입고 신은 탓에 으슬으슬 몸까지 떨려올 정도로 춥다.
게다가, 함께 가는 일행들의 재촉도 한 몫을 한다.


용렬한 육체의 고통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애써 외면하려는 지도 모른다.

결국 사진에 대한 내 욕심만 채운 셈이다.
너무 너무 아쉽지만, 가야 한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또아리를 튼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판공초까지의 그 험한 산길을 내달리면서

고산증처럼...폐부를 꽉 움켜쥐는 듯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온다.
그저 말로만 속삭이는 단순한 '미안함'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정말 미안해~


 

 

 

 

 



몇 시간을 달려내려 오자. 사람이 사는 작은 마을이 보였다.
여기는 체크 포인트.
일행의 여권을 받아든 운전사가 군인들에게 달려가자, 잠시 여유로운 시간이 난 우리는 가볍게 산책을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세 모자.

 

 

 

 

 

 

 

 
 

마침내, 판공초 호수에 이르렀다.
짚에서 내리자마자, 호숫의 물맛부터 확인했다.
짭짤했다.

원래 바다였던 이 지역이 그대로 융기하면서 생겨난 호수가 바로 판공초.
그래서 그런지, 고산지대에 맞게 진화한 독특한 모양의 갈매기가 먼저 우리를 반겼다.

 

 


 

 


화창난 날에 이곳을 찾았다면 가공되지 않은 옥빛을 그대로 볼 수 있었을 텐데...

흐린 하늘과 옅은 박무 때문에 여기저기를 오르내려도 아름다운 옥빛을 볼 수 없었다.


하늘에선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어느새 눈발까지 흩날렸다.
참을 수 있는 추위의 한계점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온 몸을 휘감는 성그런 한기가 참을 수 없을 지경에 되자 나는 근처의 식당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마른 빵 2조각과 짜이 몇 잔으로 떼워서 그런지, 한기는 더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고,
나는 연신 쿨럭이며 내 몸의 이상증세를 기침으로 내뱉어야 했다.


 

 

 

 

 

 

그의 복음밥은 정말 맛이 없었다.
배가 고파서 먹긴 하지만, 마치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퍽퍽했다.
허허로운 이곳에서 그나마 추위를 피해 배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지만,
마른 볶음밥을 먹고 있자니 목이 턱턱 막혀왔다.

챙겨놓은 비장의 무기, 고추장을 그제서야 꺼냈다.

고추장의 매운 맛 때문에 커리향이 희석되니 그나마 먹기에 편해졌다.
옆에 앉은 홀랜드 커플도 맛이 없었던지 내가 건낸 고추장을 애써 받아들었다.

그들에겐 커리맛나는 이 집의 맛없는 볶음밥이나 내가 건낸 고추장이나 검증되지 않은 것 마찬가지였을테지만,
예의상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추장에 비빈 볶음밥을 먹으며 한결 낫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레에서 만난 사람들

 

 





 

  

커피 한 잔 생각이 간절했다.
하루에도 몇 잔씩 마셔대던 커피였는데 이곳에선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자주 가는 쥬스가게의 커피는 내 입맛에 맞지 않은 밀크커피라서 꺼리게 되고
독일 빵집으로 유명한 게스모라는 곳은 많은 서양인들 때문에 발길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며칠 전, 인도인 친구 지란집과 함께 찾았던 라라 갤러리를 다시 갔다.

9시면 문을 연다는 라라 갤리러는 왠일인지 10시가 넘어서도 문이 닫혀 있었다.
그 아래에서 장사를 하던 영감님에게 물으니, 그저 곧 올 것이라는 대답만 하셨다.
그러면서도, 영감님은 특유의 장사수완을 발휘하셔서 내게 작은 기념품을 꺼내 보이셨다.
그다지 필요없는 기념품이었지만 선뜻 돈을 꺼내 값을 지불하고 기념품을 받아들고는 나의 제안도 밝혔다.

'영감님의 사진을 찍고 싶어요~!'

그렇게 담은 영감님과 그의 손자.

 


 

 

 

 

 


하루에도 몇 번이나 들리곤 했던 쥬스 가게의 점원이다.

녀석은 인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면 제법 정이 들어서 먼저 인사할 법도 한데, 예외없이 첫인사는 내가 건내야 했다.

하긴, 녀석의 웃는 얼굴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주문을 받을 때도, 사람들과 애기를 할 때도, 심지어는 사진을 찍어주는 그 순간까지도 녀석에겐 웃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녀석의 미소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사진을 찍어서 즉석에서 인화를 해줬을 때였다.
사진을 받아든 녀석의 입가가 신기한 미소로 번져가는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다.
사진을 받아든 녀석은 아주 정성스럽게 어루만지며 고히 접은 한 마리의 학처럼 조심스럽게 지갑에 넣었다.

 


  

 

 





 

 

 

그는 티벳 사원 옆에 있는 작은 여행사에서 일한다.
판공초에 가려고 여기저기 여행사를 들르다 알게 되었는데,
그는 유쾌하고 친절해서 낯선 이방인에게도 쉽게 접근하고, 짜이를 대접했다.
표정도 풍부해서, 사진을 담는 내내 나까지도 행복해질 지경이었다.

"영화 배우같애~"
라고 했더니, 대뜸...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어요?"

라고 다시 되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가 어린 시절 그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단다.
여전히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는 유쾌하고 명랑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그 여행사를 거치지 않고 여행을 다녔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나를 반겼고 환대했다는 것이다.


 

 

 

 

 

 

 

쥬스 가게의 주인...
말없고 표정없는 점원과는 달리 꽤나 쾌활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쭐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거리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냈다.

흥이 얼마나 많던지, 늘 요란한 인도 노래를 흥얼대며 따라 부르는 통에 나중엔 아무것도 모르는 나까지도 흥얼거릴 정도였다.

 


 

 

 

 

 

 


아침이면 티벳탄 빵을 사러 메인 바자르 뒤쪽의 빵집에 들리곤 했다.

10루피에 대여섯개의 빵을 주는데 갓 구운 신선한 빵이 은근히 구미를 당겼다.
바삭바삭한데다 입맛에도 맞아서 아침의 요깃거리로는 더할 수 없이 적당했다.

어둑침침한 내부...

갈라진 틈새로 들어오는 햇살이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라다크 남자.

한 번쯤 시선을 줄만도 한데 그는 정성을 다해 빵을 빚는 탓에 끝내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