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파미르 고원의 끝자락, KKH에서





 

카라코람 하이웨이 :





카라코람 하이웨이(KKH)는 중국 신장 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와 카쉬미르 지방을 연결하는 고개로  예로부터 중국과 파키스탄의 이어주던 중요한 교역로라고 한다.  칭기스칸이 몽골을 세우고 그의 아들 오고타이칸은 넓어지는 대제국을 경영할 수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고,  오르콘강이 흐르는 하르호른(또는 카라코람)을 수도로 삼았다. 

이 길은 카라코람 산악지역을 넘어가야 하는데 해발 4,394미터의 쿤자랍 고개(Khunjerab Pass)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경선으로 알려져있다.
중국 신장성 카쉬카르에서 시작하여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Abbottabad)에 이르는 길이 1,200km에 이르는 이 길은 해발 3,600미터에 위치해 있는 카라쿨 호수와 곤륜산맥의 콩구르봉(7,719m), 무즈타크봉(7,546m)이 위치해 있으며 파키스탄으로 넘어가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잘 알려진 훈자마을, 인디애나 존스의 촬영지로 알려진 파수 및 굴밋 등도 유명하다.


한편 카라코람 산맥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봉(8,611m)와 세계에서 아홉번째로 높은 낭가파르밧(8,125m) 등
8천 미터 이상의 준봉만도 5개가 되며 이들 산에 접근하기 위한 유일한 경로이기도 하다. 

















 






한편 카라코람 고개길은 고대 한국인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라의 혜초스님도 인도의 북서부에서 아랍인들이 통치하는 대하(大夏)의 북부를 통해 카라코람 고개를 넘어
타쉬쿠르간-카쉬카르을 통과하고 쿠차-옌지-고창을 거쳐 시안-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인도의 중부에서부터 옌지에까지는 이르는 여정을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여행문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책은 당시의 불교상황, 나라별 통치관계, 당시의 풍속 등을 기록한 소중한 자료로서 1908년 돈황에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게 우연히 발견된다.


당나라 때 동서의 물꼬를 튼 장수로 잘 알려진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유민 출신이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747년 악수, 카쉬카르, 타쉬쿠르간을 거쳐 파미르 고원(카라코람 고개)을 넘어 토번(현재의 티벳)의 군사기지인 연운보蓮雲堡(치트랄)를 격파하고 다시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소발율국小勃律國을 정복한 뒤 사라센과의 유일한 통로였던 교량을 파괴하고 돌아온 후부터였다.


이때 그가 이끌고 갔던 부대의 규모는 단 1만명.
그의 전략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는데 120여일만에 파미르고원과 힌두쿠시 준령을 넘어 사라센과 교통하던 소발율국의 수도를 강타하니 인근 72개국이 단번에 항복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의 힘의 헤게모니(우위)는 당나라로 넘어오게 된다.
(물론 이후 탈라스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당나라는 안사의 난 등을 겪으며 패국의 길로 접어들고, 당의 제지술이 사라센(당시 압바스 왕조)과 서양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다.)
 

- 고선지가 파미르고원을 넘기 꼭 20년 전인 727년에 이곳 파미르 고원을 넘었던 혜초스님은 왕오천축국전에서 이곳을 넘어야 하는 그의 참담한 심경을 고백한 바 있다.  "가파르고 높은 산에 나는 새도 놀라고 사람은 외나무 다리에 의지해야 하는데 어떻게 파미르고원을 넘어갈 것인가"
 

- 1906년 영국인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스타인경은  고선지 장군의 원정루트를 따라 수차례 파미르고원을 넘어 탐사를 한다. 
  바로 고선지의 위대한 역사를 세계에 알린 사람이다.  탐사 후 남긴 박사의 방대한 저서 곳곳에는 고선지 장군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카라코람 하이웨이는 언제나 내 여행 리스트의 최상위 목록에 링크되어 있었다.
사진으로 처음 접한 카라코람의 신비로운 황량한 풍경이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서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듯 여행지를 결정할 때 다른 사람의 사진에 의해 많이 좌지우지된다.
비록 내가 갔을 때의 상황과 사진 속의 상황이 다르다고 할 지라도 사진은 떠남을 부추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 듯 하다.
사진가의 시선에 의해 재해석되고 때로는 확대되거나 왜곡되어 나온 결과물이 사진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끌림은 어쩔 수 없다.


이국적인 풍경이나 풍광도 물론 충동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가지 못해 안달나게 만드는 사진은 무엇보다 인물사진이다.
황량하고 척박한 땅에서 삶의 뿌리를 내딛고 살아가는 그곳의 사람들...
그 슬픈 눈빛에서 때론 환한 웃음에서, 때론 자연의 일부라도 된 듯 동화되어 가는 그들의 몸짓에서 미칠 듯한 그리움을 훔쳐보게 된다.
제대로 담은 포트레이트에선 그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오랫동안 바라보는 버릇도 그래서 생겨났다.



























이렇게 되면 슬슬 오기가 생긴다.
이 세상에 못 갈 곳은 없다는 게 여행에 대한  기본적인 지론이다.
물론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는 경우나  특별히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에 의해 위험지역으로 분류된 곳이나 아주 남극, 북극, 또는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산꼭대기 등은 예외로 치더라도, 세상엔 특별히 못 갈 곳은 어디일까.

교통편이 불편해서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하겠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이동하고 생활하기엔 조금 불편할 테고,
현지언어는 인삿말을 제외하곤 거의 모르는 편인데다 영어마저 능숙하지 않아 현지인들과의 깊이있는 대화는 불가능하겠지만 그저 바라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여행은 어딜 가더라도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카메라와 여유로운 메모리,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약간의 도구만 있다면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들뜨게 하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는 지난 여행에서 체험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서 카라코람으로 여행을 떠났다.
더 정확하게는 중국측 카라코람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사실, 쿤자랍패쓰를 타고 파키스탄으로 넘어가서 라호르를 거쳐 다시 인도의 라자스탄 지방으로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파키스탄 비자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일정의 뒷부분을 약간 조정해서 티벳의 암도지방의 일부지역으로 돌리긴 했지만 어쨋든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카라코람을 이용하는 외국인이라면 파키스탄의 소스트에서 파키스탄 입국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낯선 길을 달리는 내내 꽤 많은 사진을 찍었고 꽤 많은 상념에 젖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너무 많은 사진을 찍은 탓에 정리하기조차 벅찰 지경이었고 제대로 담은 몇 장을 가려내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다.
머리는 수많은 생각으로 실타래처럼 꼬여서 언어로 표현하는데도 한계가 부딪히고 만다.
이곳은 수만가지 언어가 무의미해지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그저 몇 장의 사진 속에 함축된 표현만으로도 생각을 전달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듯 하다.

아무튼 그렇게 '하늘길'을 달렸고 드문드문 나타나는 유르트에서 키르키즈인들과 타지크인들을 만나서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풀 한 포기조차 제대로 없는 산들과 곤륜산맥의 끝자락에 우뚝 선 설산들의 위용은 그래서 더욱 빛났다.
하늘색은 에메랄드 빛보다 더 푸르렀으며 거침없이 쏟아지는 햇살 속에 그대로 노출된 타지크 여인들의 피부는 붉다 못해 검기까지 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이 멈춘 듯이 정지된 이곳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설산이 바라보이는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유르트 형태의 건물이 몇 동 보이고 넓은 계곡을 이어주는 불안한 나무다리도 보였다. 
사람들이라도 보이면 이 황량함이 많이 감쇄되고 편안할텐데 라며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건물 사이로 어른거리는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언듯 그 사람이 뒤돌아보는가 싶더니 신호라도 주고 받았는지 금새 건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몰려나온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대여섯명정도... 손에는 꾸러미를 한 가득  들고 있었다. 
우리 차가 서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우르르 몰려나온 것.

이곳은 키르키즈 사람들의 땅이다.
키르키즈 사람들은 투르크계의 유목민으로  키르키즈스탄에 60%가 살고 있고 나머지는 중국 신장지역의 산악지대와 고원, 아프가니스탄의 바한지역 근처에 흩어져 살고 있다.
키르키즈라는 말은 '불멸'을 의미하는데 유목민으로 수세기를 살아오면서 수많은 다른 민족의 정복을 당하며 살아왔으나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이며 참을성이 뛰어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언어학적, 민족적으로는 투르크 계통으로 분류되지만 오랫동안 몽골계와의 혼혈로 인해 생김새는 몽골인들과 거의 흡사하다. 


이들은 지나가는 여행객의 차량이 멈출 때마다 손수 만든 수공예품을 들고 나와 장사를 하며 생계를 연명하는 듯 했다. 
척박한 지역에 사는만큼 생김새도 옷차림도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가온 그들의 몸에선 시큼한 야크젖냄새가 묻어났고 땟국물로 꼬깃꼬깃한 옷차림에선 연민의 정까지 느껴졌다.


그들에겐 이렇게 파는 물건이 곧 중요한 생계의 수단으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유목을 하며 초원을 누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머물고 있는 협소한 계곡에는 양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데다 낡고 오래된 유르트 안의 살림살이에는 지독한 가난의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척박하고 거친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래도 이들의 삶은 건강하게 유지될 것이다. 
거친 황야에서 양을 키우고, 비록 거친 환경이지만 눈이 시린 설산을 바라보며 건강하게 뛰어놀 아이들. 
거친 바람과 추위로 인해 볼은 빨갛게 타들어갔지만 아이들의 눈빛은 너무나 맑고 깊었다.


































카라코람 하이웨이 옆으로는 아름다운 자연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구름덮힌 하늘에서 밀려오는 혹독한 한기와 더욱 더 거칠어진 바람 때문에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모래바람이 뽀얗게 일어나는 사막산 포인트, 일명 굼타흐라고 부르는 곳에 그렇게 도착했다.
오가는 여행자들에게 물건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키르키즈 사람들이 막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어느새 아름다운 풍경에 현혹당한 우리들은 그들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도로밑으로 성큼성큼 내려가서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풍경 앞에 압도당해 있었다.



풍경을 하나라도 더 담기위해 끊임없이 셔터를 눌렀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풍경이 사람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말인 듯 같다.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희멀건 쪽빛 하늘과 제대로 빛을 받은 뭉게구름들이 환상적인 이미지를 연출시켰다. 
거친 바람이 불든, 추위가 여린 내 몸을 스치고 지나든 말든 외부의 어떤 요인들에게도 아랑곳없이 사진을 찍고 눈에 각인시키기 위해 분주했다.

호수 너머로 엄청난 모래폭풍이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래 폭풍이 쌓이고 쌓여서 하얀 모래산을 쌓았다고 하니 자연의 신비로움은 어떻게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제대로 빛을 받은 모래폭풍은 마치 수증기처럼 부유하는 듯 보여서 아련한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엇다. 
그렇게 기대했던 카리쿨 호수에 도착했지만, 무스타커봉은 거대한 구름에 가려 웅장을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을씨년스럽던 하늘에선 빗줄기를 토해내더니 바람은 아까보다 훨씬 거칠어졌다. 
여름잠바 하나만 달랑 걸쳤으니 오들오들 입술이 떨리면서 혹심한 추위에 온 몸이 오그라들 정도였다. 
유르트(일종의 천막집)에서 키르키즈스탄 사람들이 또 몰려왔다. 



























카스에 오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카라쿨 호수를 방문한다고 한다. 
주로 여행사를 통해서 택시를 렌트해서 이곳에 오거나, 카스에서 타스쿠르간까지 가는 버스를 이용해서 이곳에 오는데 카라쿨 호수 주변의 키르키즈 사람들의 유르트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카라쿨 호수 주변을 돌며 말을 탄다고 한다. 여행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현지인들은 약아질 수밖에 없고 특히 비수기엔 서로 경쟁이 생겨 앞다퉈 정차하는 차들 곁으로 몰려왔다.


기대했던 카라쿨 호수는 흐린 날씨 때문에 전혀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카스로 돌아갈 때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바람이 잦아들어 무스타커봉의 반영이 카리쿨 호수에 아름답게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 뿐….
무스타커봉을 돌아 다시 언덕으로 올랐다.

해발고도는 어느듯 4,600미터. 
예전 인도의 라다크에서 판공초로 가던 창 라 고개가 5천미터가 넘었으니 그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혹시 생길 지 모를 고산증에 잔뜩 긴장하며 창밖 풍경만 바라봤다.

이곳의 주제는 그야말로 황량함이다. 
설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달리다보면 그 황량함이 어느새 피부속까지 파고드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드물게 나타나는 푸른 초원에선 어김없이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었고 키르키즈 목동들이 주변에서 양을 돌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쳐서 인사처럼 미소를 지어보이면 그제서야 슬며시 웃어보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