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찾아간 아름다운 원색의 부라노

 

 

 

                        부라노섬

초호섬 가운데 가장 다채로운 곳으로, 경사진 탑이 있는 교회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구분이 간다.
유령이 나올 듯한 토르첼로와는 달리 인구 밀도가 높으며, 수로 가장자리에는 카사 베피와 같이 밝게 채색된 집들이 늘어서 있다. 
주요 도로는  발다사레 갈루피 거리로, 이 거리의 명칭은 부라노 태생의 작곡가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전통적인 레이스, 린넨 상점들과 신선한 생선요리를 파는 노천 음식점이 유명하다.

부라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어업과 레이스 생산업에 종사해 왔다.
배나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의 모습은 지금도 찾아볼 수 있으나 레이스 만드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16세기 유럽으로 수출된 레이스는 '푼토 인 아리아'(공기 속의 점들)로 알려질만큼 정교했다.
18세기 침체기 이후 다시 산업이 부활했고, 1872년에는 스쿠올라 데이 메르레티라 불리는 레이스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오늘날, 부라노 진품은 매우 드물다.







 

 




내가 베네치아를 방문한 이유는 단지 '부라노'섬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부라노섬만 아니었다면 피렌체에 남아서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느긋하게 장엄한 일몰과 야경을 감상했거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는 아레쪼 평원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으러 떠났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베네치아에서 로마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5시간 남짓이니 이래저래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반나절이나 소요됐다.


짧은 일정으로 여행을 다니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기차에서 보내는 5시간은 쓸데없이 낭비되는 돈보다도 훨씬 아깝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토스카나 지방과 부라노섬만큼은 꼭 돌아보고 오리라 결심하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세웠던 '하고 싶고 보고 싶었던' 몇 가지의 계획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행하고 실천하는 편이다.
어쩌면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에서 비롯되는 끊임없는 유혹의 결정체라고 보기 때문에, 항상 우선순위에 올려두고 실천에 옮기게 된다.


사실, 베네치아에 도착하자마자 부라노섬을 다녀오려고 했다.
하지만 비까지 오는데다 길도 모르고 해서 이래저래 민박집에서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훌쩍 오후 시간이 흘러버렸다.
다녀오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했고 게다가 추적거리며 내리는 비는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으니니 선뜻 나설 용기마저 없었던 모양이다.


5시도 안된 새벽녘에 눈이 뜨졌다.
어젯밤에 동행했던 여대생들에게 새벽에 일어나 부라노를 갈 것이라고 했더니 그녀들도 동행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었다.
여자방으로 다가가 작은 노크소리를 내자 그녀들도 이미 깨어 있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성그런 베네치아의 새벽거리로 나섰다.

부라노행 수상버스를 타려면 제법 먼 거리로 이동해야 하는데 골목으로 형성된 그곳을,
그것도 어둠이 옅게 깔린 새벽녘에 걸어가야 하는 게 여간 부담이 되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또 묻기를 몇 번이나 거듭한 끝에 겨우 부라노행 수상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무뚝뚝하게 보였던 베네치아 사람들은 은근히 친절했다.


지도를 들고 다가가 '챠오'라고 인사한 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손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말로 상세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이니 한 아저씨는 내 팔을 끌고는 찾기 쉬운 지점까지 직접 이끌어주시기까지 했다.
놀라운 그들의 친절은 잔뜩 주눅들고 움츠려 있던 우리같은 이방인들에겐 기쁨이고 즐거움이었다.
이런 친절이야말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서로 소통하게 되는 작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새벽녘에 부라노행 첫수상버스를 탄 여행객은 우리밖에 없었다.
작은 부라노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궂었던 하늘에선 급기야  빗줄기까지 긋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다 위를 건너오느라 잔뜩 추위에 굳어있던 몸, 게다가 을씨년스러운 빗줄기가 떨어지니 정신마저 혼란스러워졌다.
비 내리는 텅 빈 선착장에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한참 방황하고 있는 세 사람.


근처에 문을 연 커피숖으로 무작정 찾아들었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부라노섬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을 것 같은 커피숖엔
이미 현지인 남자들이 모닝커피를 들다가 느닷없이 찾아든 우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개운하고 구수한 커피향이 가득해서 오히려 친근함이 느껴지던 작은 가게와 늙은 주인...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넣어 만든 일종의 '아메리카노'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낯선 부라노의 아침을 맞이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햇살이 가득한 날, 원색의 집들이 빼곡히 들어선 그곳에선 잘 말라가는 뽀송뽀송한 빨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그런 모습만 상상했었는데,
예상에 없던 비가 쏟아지는 부라노는 과연 어떤 이미지로 다가올 지 걱정부터 앞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커피를 마시는 그 순간만큼은 꽤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커피향은 꽤나 향긋했다.


대단한 커피 매니아이거나 커피에 대해 박식한 지식을 갖춘 사람은 아니지만
설탕이나 프림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커피 특유의 원두맛을 즐기다 보니 어디 가서나 커피의 맛을 비교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커피는 전반적으로 맛이 뛰어난 편이어서 비록 이름없는 허름한 가게에서 커피를  마시더라도 만족스러웠다.


아침녘이라 그런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겨 있었다.
관광객은 아예 없는데다 오가는 현지인들의 모습조차 뜸했다.
너무 한적해서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관광지인지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부라노섬은  빗속에 과묵하게 잠겨 있었다.
원색으로, 강렬하게 채색된 집들이 빼곡하게 늘어선  수로 쪽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동화의 나라가 턱하니 버티고 있었다.
비록 먹구름이 잔뜩 끼여있는 하늘과 강하진 않지만 끊임없이 긋고 있는 빗줄기 때문에 오히려  원색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셔터를 눌러서 LCD로 사진을 확인해보니 원색의 두드러짐은 더욱 강렬하게 드러났다.
조금 전의 걱정과 실망은 금새 즐거움과 환희로 바뀌었고 버릇처럼 셔터를 눌러댔다.


너무 사람이 없어서 계획했던 사진을 온전히 담기는 힘들었지만 빗물에 촉촉히 젖은 부라노섬의 운치를 제대로 표현하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햇살이 너무 강한 날에는 오히려 노출차이 때문에 꽤 고민을 하며 사진을 담았을테지만
구름으로 인해 생긴 확산광 때문에 오히려 전체적인 느낌을 담기엔 더 없이 좋았다.
단지, 구름이 너무 짙게 깔린 탓에 ISO를 올려야 하는 한계와 동적인 느낌을 제대로 살린 사진을 찍는 건 힘들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부라노섬 특유의 화사하고 알록달록한 원색의 느낌을 표현하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늘 햇살이 풍부한 날에 찍었던 부라노섬의 사진만 봐왔던 게 각인처럼 내 머리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비 내리는 날은 어떻게 찍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몰라서 한참 혼란스러웠는데, 흔한 말로 대충 찍어도 그림이 될 그런 풍경이었다.
아니, 사진을 떠나서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다.
수많은 관광객들로 연일 몸살을 앓을 정도로 복작대는 베네치아의 그 좁은 골목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서 더욱 그랬다.
사람이 없어 한적한데다 가끔씩 만나는 부라노사람들에게 '챠오'라며 인사를 날리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웠다.

비가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걷지 않은 빨랫감들이 널려있는 작은 집들이 틈틈히 나타났고,
예쁜 꽃들이 담긴 화분이 창문밖에 놓여져 있는데다, 함부로 놔둔 우산마저 원색의 집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원색의 집들이 지나치게 인공적이어서 이내 식상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삶의 편린들이 고스란히 놓여있는 자연스런 모습때문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른 새벽, 그녀들과 함께 한 부라노 섬 산책은 그야말로 유쾌했다.
너무 한적해서 기분이 좋았고 단지 관광을 목적으로 채색된 집이 아닌 탓에 더욱 그랬다.
비록 여행을 훼방놓는 빗줄기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독특한 분위기로 인해 더욱 화사하게 느껴졌던 부라노...


그 뚜렷한 기억이 머지않아 추억처럼 옅어져 갈테지만 나는 여전히 그곳을 그리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