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여행] 나를 찾아 떠난 몽골여행의 에필로그

 


 

몽골여행은 자유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
아니, 나를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
정신적으로 꽤나 피폐해 있었다.

문득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바람을 느끼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바리바리 배낭을 꾸리고 짧은 일정이지만 무작정 몽골로 날아들어왔다.

바람을 찾아 떠난 여행...
자유를 찾아 떠난 여행...
나를 찾아 떠난 여행...

 

하지만, 황량한 광야에서 느낀 건 오히려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의 결들을 결코 잡을 수 없음을 비로소 알았다.
내심 기대했던 바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실체없는 뜬구름같은 것이었다.
격정같은 열정이 용솟음치고 불꽃같은 희망이 새록새록 가슴에 각인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런 바람이 아니었다.
그 결들은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형의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상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마음은 진정되지 않고 여전히 고통과 피폐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단지, 끊임없이 내 자신을 부추기는 어떤 두려움...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삶에 대한 미망...
아득히 먼 길에 대한 공포만이 가슴 켠켠히 먼지처럼 쌓여갔을 뿐이다.

떠남으로 인해 모든 것이 망각되고 소실될 것이라는 착각이 얼마나 헛된 바램이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초원에서 이는 바람은 수풀을 눕히고 강을 건너서 내 가슴 속으로 밀려들었다.
손금에 새겨진 운명의 길들이 일렁이는 바람에 노스탤지어의 깃발처럼 펄럭였다.
정작 깨닫지 못하는 사이, 미련한 사색들만 끝없는 나락 속으로 내 육신을 떠밀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이 서걱이며 바람소리를 흉내냈다.

여행은 끝이 났지만,  나는 한동안 생채기처럼 모진 여행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전히 한국의 날씨는 늦여름의 열기로 후끈거렸고 제대로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여린 몸뚱아리는 내내 고열로 앓아 누워야 했다.
가슴 속으로 초원의 서늘한 바람이 불 때면 밤마다 쉼없이 베게잇을 적셨다.

그리움이 점점 병이 되었다.
그리움이 바람이 되었다.
바람이 내가 되었다.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나는 정말 어리석게도 그제서야 깨달았다.
바람은 늘 내 마음 속에 있었다는 것을...
그 아득한 현실을 외면하는 순간 느낄 수 없었을 뿐이라고...

마음은 그렇게 속삭였다.


몽골은 내 정신의 원천같은 곳이었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였듯이...
태생의 본류가 비로소 시작되던 곳, 돌이켜보면 그래서 마음도 몸도 편했었으리라.
어느새 몽골 초원이 그립다.
몽골로  가는 꿈을 가끔 꾼다.
엄습하던 그 지독한 추위만 없었어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을 바람의 땅으로...


그렇게 바람을 안고 훌쩍 떠나고 싶다.



       

 


 








황량한 초원에서 어떻게 이런 색을 생각해냈을까.
오래되어 빛바랜 색감과 나무의 질감의 느낌을 도드라게 담은 어느 창틀을 찍었다.
게르가 아닌 일반 몽골인들의 집들은 꼭 저랬다.

 












 

우리가 묵었던 게르 앞에 주차해있는 푸르공.
여행 비수기라 그런지 몽골의 어디를 가도 이렇게 한적한 느낌이었다.
몇 개의 투어리스트가 있긴 했지만 그 곳에 숙박한 객은 오직 우리 일행들 뿐.
덕분에 시끌벅적한 여행지의 어수선함보다는 어느 시골의 뒷산에 온듯한 차분한 느낌을 받곤 했다.


왼쪽 끝에 보이는 것이 바로 화장실이다.
이처럼 몽골의 화장실은 집 또는 게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화장실은 우리의 예전 시골의 그것처럼 재래식이어서 그 깊이 모를 공포심 때문에 한밤엔 찾기조차 무서웠다.
그래서 작은 볼일 정도는 별이 환하게 보이는 넓은 벌판에서 봐야했고  지독하게 성그런 냉기와 함께 어설픈 쾌감을 느껴야 했다.

 






 







Amarbayasgalant Khild라는 긴 이름을 가진  불교사원 앞의 어떤 문양.













아마르바이아스갈란트 킬드(Amarbayasgalant Khild)라는 아주 긴 이름을 가진 불교사원 앞.

이 절은 1737년 청나라의 옹정제 시절 건립된 것으로, 1937년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10개의 사찰이 파괴되었지만, 그럭저럭 보존상태는 깨끗한 편이었다.
다음 목적지가 어디냐는 우리의 물음에 잉케는 중국의 왠만한 불교사찰보다도 아름답고 웅장한 곳이라는 대답으로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줬다.
그의 단호한 대답 때문에 꽤나 기대를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막상 찾아간 절은 마당에 키높은 잡초가 자라고 있는 쇠락한 불교 사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랫동안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온 탓에 사찰의 양식은 중국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라마불교의 곰파와는 또다른 형식, 그래서 오히려 친근감이 들었다.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시던 조선생님을 함께 담았다.











엊저녁까지만 해도 비가 내리더니 아침엔 구름만 잔뜩 끼여 있었다.
정문에서 바라보면 저런 저런 모양이다.
작은 둔덕을 낀 허허벌판 가운데 오직 불교사찰만 휑하니 놓여있었고 하늘은 여전히 스산했다.

아무도 찾지 않은 낡고 쇠락한 사원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여 우리 여행의 무사함을 기원했다.

잉케에게 물으니 얼마전에 있었던 축제에서  사람들이 저 원안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그나마 축제 때 왔으면 꽤나 볼거리가 많았을 텐데 여행시즌을 놓치면 그나마 그런 축제같은 것도 없었다.

휑한 바람만 낯선 이방인들을 반길 뿐이었다.

 

 




















사찰의 명패를 살펴보니 "칙건경영사'라고 적여있다.
한자와 고대몽골 문자가 함께 씌여 있는 걸 보면 청나라 시기에 창건한 사찰임에 분명했다.

키릴문자를 사용하기 이전의 몽골에서는 자신들이 제창한 몽골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원나라 패망 이후 끊임없이 중국의 감시를 받으며 압제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몽골은 구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몽골공산혁명으로 독립을 하게 되고  고대몽골문자의 글자수가 많은데다 맞춤법이 고정되어 현실의 발음과 차이가 났고 게다가 익히기 어려워 문맹률이 높다는 이유로 금지시킨 뒤  키릴문자로 그들의 언어를 차용도록 했다.

1946년 문자개혁을 단행해서 키릴문자 33개와 변형문자 2개를 합친 35개의 변형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는 구소련의 영향이 무너진 1990년대 이후 '민족주의' 강화 정책에 따라 고유 문화 회복을 위해 고유 문자(몽골비치크)를 복구하여 94년부터 전면 실시하고자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배우기 어려워 최근 국회에서 보류 중이라고 했다.

문자가 없었던 몽골인들에게 징기스칸은 왕자들에게 위그루 문자를 배우게 한 것이 몽골문자의 효시였다.
하지만 몽골어 표현에 불편함을 느낀 쿠빌라이 칸은 티벳 승려 파스파에게 새로운 몽골문자(파스파문자)를 만들게 하고 이를 공식문서에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파스파문자는 몽골어의 음소를 표기하는데는 우수했지만 글을 쓰기에는 불편해서 원나라의 몰락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신 위구르식의 몽골문자가 17세기 근대 몽골문자로 발전되었고 이때 만주족의 문자에게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유달리 이런 프레임을 좋아한다.
일명, 프레임 안의 또다른 프레임.
동자승들이 들어가길래 뛰어가서 담았다.


왠지 아쉬운 느낌이 들어 조금 더 기다렸더니 또 한 웅큼의 동자승들이 문 쪽으로 총총히 걸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보면 유난히 빨간 법의를 두른 동자승이 많이 눈에 띄였다.












문턱에 놓여있는...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마니차가 앞에 놓여있는 사원의 대웅전.
대웅전 내부는 한 동자승의 안내로 나중에 돌아보게 된다.















문고리 한 쪽에 달려있는 표식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양식이 중국풍이다.
이 절은 만주족 황제의 은덕을 입었다 해서, 기와가 모두 용 문양으로 되어 있다.
무력으로 또는 종교적 힘을 빌어 잔인한 몽골족들을 순화시켜 지배하려고 했던 청나라의 의도가 뚜렷이 보이는 사찰.

어쩌면 몽골인들의 고단하고 슬픈 역사가 오랫동안 깃들어 있는 사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16세기 후반, 몽골 사회는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라마불교의 도입이 그것이었다.
16세기 후반이후 몽골사회를 지배한 라마불교는 각 가정마다 사내아이 한 명씩을 출가시키도록 하였는데 몽골은 그 이후 인구증가가 급격하게 감소되기 시작했다. 출가한 승려는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라마 승려 숫자만큼 인구는 줄어들었다.


몽골 최후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리그단 칸이 죽자 1636년에 청나라는 고비사막 남쪽을 무력을 점령해서는 편입시키고 말았다.
게다가 1689년에는 바이칼호 주변마저 러시아의 강압에 병합되고 말았다.
러시아의 코사크 기병들이 당시 몽골의 영토였던 바이칼호 주변을 밀고 들어와 이 지역을 점령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다시 청나라는 마각을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몽골을 침략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의 문화부흥을 주도하던 몽골 불교지도자 자나바자는 외적의 거대한 세력 앞에 너무나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청나라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자나바자는 몽골의 국권을 청나라에게 바치게 되고 고비사막 이북까지도 청나라게 복속하게 되고 말았다.


19세기 중엽이 되자 몽골의 민족의식은 되살아나기 시작했고 220년간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오던 몽골은 마침내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라마불교의 8대 종정이던 복트 케겐은 몽골의 칸으로 추대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대청나라 독립투쟁를 벌여나갔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자 몽골의 군주들은 러시아의 지원으로 몽골의 독립을 주도하게 되었지만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일으나면서 다시 몽골은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고 러시아 내전때인 1920년에는 벨루로시군 5천명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담디니 쑤흐바타르가 러시아 볼쎄비키의 지원하에 군대를 조직하고 러시아 적군의 도움으로 벨루로시군을 격퇴하였으며 1921년에는 중국인마저 몽골땅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몽골인민혁면의 성공은 다시금 복트 케겐을 군주로 옹립하는데 이는 공산세력과 기존 몽골정부와의 타협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복트 케겐이 1924년에 사망하자 몽골은 또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1924년 11월에 인민공화국이 정식적으로 선포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몽골은 소련과 정치 문화 경제 이념적으로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데 당시 몽골에는 700개 이상의 사찰과 10만명 이상의 라마승들이 있었다. 몽골이 점점 공산화되면서 공산혁명에 의거해 라마교와 라마승들은 공공의 적으로 분류되어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게 되고 1937~39년 사이 스탈린의 비호를 받던 몽골정부는 2만명의 몽골승려를 학살했다.

2만의 승려를 포함한 10만여명의 지식인들이 처참하게 살육당하였고
정부의 회유를 거부한 승려들은 강제수용소나 공장 등으로 끌려가 10년형의 중노동형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는 700개 사찰의 대부분을 파괴하였고 박물관이나 군대의 막사나 창고로 사용되었으며 각종 경전과 서적, 그리고 이를 찍어내는 경판 등은 군인들의 땔감으로 사용되었고 절에 있던 수많은 보석과 귀중품들은 소련으로 보내졌다.

이 시대의 몽골 라마불교는 거의 초토화시피 한다.

 

 

 

 









사찰에 예쁜 노란색으로 칠해진 또다른 건물이 있었다.
이 사람들, 아니 라마 불교의 색깔 감각은 정말 탁월해 보인다.
둘러보는 내내 그들의 그런 감각에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몽골에서 거의 파괴되다시피 한 라마불교는 여전히 아름다운 색감을 화려하게 생존하고 있었다.
종교의 그 끈질긴 생명력에 새삼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어느 건물 내부에서 바라본 천장의 문양들...
예쁜 색감과 정교한 문양, 그리고 늘어선 패턴들이 사뭇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어? 눈 감아버렸네."

















입체감과 패턴을 살려보려고 찍은 건데, 의도와는 달리 밋밋하게 나와버렸다.

우중충한 그 날의 하늘.

하지만, 동쪽 하늘이 그나마 열린 탓에 서늘한 아침 빛이 휑한 사찰 안으로 흘러들었다.






 


 

 

  

 

한 건물 앞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동자승들.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이미 익숙해진 듯~

 

 

 

 

 

 
프레임 속의 프레임의 시도...
이 사찰에선 계속 이런 시도만 하게 된다.
나중에 우리를 안내할 동자승의 뒷 모습이다.

과묵해서 말이 없는데다 옅은 미소까지 매력적인 소년...

 

 


 

 

 

 

 

  

가지런히 놓여있는 마니차.
저걸 돌리면 경전을 읽은 셈이 된다고 한다.
글을 모르는 일반 신도들을 위해 저렇게 해놓은 것이라는데...

 

 

 

 

 

 

 

 

 

 

가지런히 정돈된 느낌.
저 곳에 불을 붙여, 연기를 들어마신다.

 

 

 

 

 








 

 

 

'헉 똥 밟았다.'

다행이 가축의 분변(糞便)을 교묘히 피해가는 동자승들.
사찰 안인데도 불구하고 가끔 소나 염소같은 가축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녀석들이 마당에 가득 피어난 잡초를 뜯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어린 동자승이 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간다.
꽤나 지각한 모양이다.

 

 

 

 

 

 

 


사찰 밖에 있던 오래된 솥.
이 절을 방문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밥을 지었던 흔적인 것 같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찰을 방문했는지 증명하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그저 쇠락해가는 절처럼 보인다.

 

 

 

 

 

 

 

 

 

 






 

 

우리를 안내한 동자승.
정말 안내만 했다.

말없이 문을 열어주고, 우리가 건물 안을 돌아볼 동안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몽골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할 것 없이  대부분 말이 없고 조용한 편이었다.

소통되지 않는 언어의 차이 때문도 그렇겠지만 천성적으로 수다스럽지 않은 게 그들에 대한 내 견해였다.
있는 듯 없는 듯 곁에 있으면서도 조용하게 자신의 할 일만 하는 잉케만 봐도 그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의 눈빛이 꽤나 우수에 젖어 있어서 마치 몽골의 가을을 닮아 있었다.

 

 

 

 

 

 

 

 

 













 

 


착 가라앉게 하는 붉은색(주황색도 아닌...)이 마음을 끈다.
이들의 색감은 왜 이렇게 마음을 끄는 걸까.
그들의 마음의 창도 저런 느낌일까. 

늘 이런 식으로 나는 세상을 보고 싶어한다.
한 걸음 떨어져서 관조하듯 바라보는 세상보기.
때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주변만 서성이는 극단적인 회색분자의 모습이겠지만
나는 그런 모습이 오히려 더 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촛불 불빛에 투영된 동자승의 모습...

왠지,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연신 카메라 터져나오는 카메라 셔터 소리 때문에 동자승은 단단히 얼어붙은 듯 몸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시선을 끌었다.
다른 색은 이미 바래어져, 제 색깔을 잃었다.
저 안엔 불교 경전이 자그맣게 들어 있었다.

처음엔 벼게인 줄 알고 들춰보기까지 했다.
늘 눈에 보이는 현상만 따르는 버릇,
육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결코 믿지 못하는 불신의 벽이 내 몸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보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닌데도 말이다.

 









 

 

 

 
마니차를 돌리던 동자승...

 

 


 

 

 




 


타고 가던 푸르공 안에서 찍었다.
그렇게 몽골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