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여행] 라다크를 떠나며 사람들을 추억하다






 

맑게 개인 날씨 때문에 어느새 기분까지 개운하다.
높은 고도 때문인지 대기는 너무 투명하고 깨끗해서 금새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다.
날씨에 따라 그 날의 컨디션이 달라지는 걸 보면 나도 참 단순한 인간인 모양이다.
흐린 날엔 한없이 꾸물꾸물한 기분이다가도 날씨만 활짝 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이 난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좋은 날씨...


레에서의 일상이 언제나 그랬듯이 식당 라마유르에서 볶음밥을 시켜먹는다.
볶음밥 한 끼에 알싸한 민트차 한 잔이면 밤새 뒤척였던 공복이 말끔히 사라지고 입 안엔 말끔한 민트향기만이 감돈다.
느긋하다.
라다크 여행의 마지막날이라서 더욱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따로 일정을 잡지 않은 탓에 한량처럼 편안하게 거리를 거닌다.
어느새 익숙해진 레 시내를 한 바퀴 돌다가 낯선 얼굴이라도 만나면 금새 '쭐래'라는 인삿말이 새어나온다.
자주 가는 라씨집에 앉아서 담배 한 개피를 태우면서 레라는 좁은 세상을 훔쳐본다.
정지된 화상처럼 햇살만 난무하는 레 시내는 오가는 사람들도 별로 없다.

라씨 집 앞의 사찰로 드문드문 순례객들이 드나들긴 했지만 그들의 걸음은 언제나 느렸고
아침무렵이라 그런지 좌판을 펼치지 않은 할매는 나처럼 바깥만 기웃거리며 구경하고 있다.
독특한 음색의 인도음악도 마치 늘어난 테이프마냥 흐느적거리긴 마찬가지였다.
달콤한 오전의 햇살이 주는 따뜻함, 살랑거리는 바람.
잔뜩 포만감으로 부른 배와 달짝지근한 망고라씨...
나는 비로소 여행자가 되었다.

 

















바쁘게 세상을 살다보면 내 주위의 사물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산에 올랐어도 새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처럼 파란 하늘 아래에서도 햇살의 정겨움을 깨닫지 못한다.
엉뚱한 곳에 온통 신경을 빼앗겨 버린 머리는 철저하게 감성적인 부분을 도려낸 채 외면하고 살아왔다.
느낄 수도, 깨달을 수도 없는 삶.

앞에 놓여진 작은 욕심에 눈이 멀다 보면 삶은 내가 생각했던 방향을 훌쩍 빗겨나기 일쑤였다.
무채색의 도시를 거닐 듯, 내 삶은 짙은 회색으로 한동안 얼룩져 있었다.
적어도... 사진을 알고 여행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때 산에 미친 적이 있었다.
함께 일하던 직원이 '스키를 잘 타냐'고 물었을 때 '스키는 못타도 산은 잘 탄다'고 선뜻 대답할만큼 산행을 좋아했었다.
시간만 나면 전국의 온 산을 마치 섭렵하듯 올랐고 그곳에서 나는 문득 커져가는 외로움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단지 오르기 위한 목적으로 올랐던 그 산에서 나는 커져가는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없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산에 올랐어도 제대로 산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내 시선은 내 발앞에만 고정되어 있었고 마치 마라톤선수처럼 시간 단축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기록이 끊임없이 갱신되어 갔지만 마음은 한없이 초조해져만 갔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대로 산을 보자는 마음에서 카메라를 사기로 했다.
종로의 어느 카메라점에서 꽤 거금을 들여 캐논 eos 5를 샀다.
바디 하나에 렌즈(28-105mm) 하나가 고작이었지만 파인더로 보는 산은 또 다르게 다가왔다.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했고 아름다운 산하를 눈여겨 살펴본 적도 없었는데, 사진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는 기분이었다.

맑은 새소리가 들려왔고 운해가 휘감기는 새벽녘의 아름다운 높은 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연두빛 이파리마다 걸려있는 화사한 햇살이 보이는가 하면, 짙은 안개와 숲을 비집고 나오는 강렬한 햇살 줄기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으로 담는 세상은 정말 특별했다.

점점 산행보다는 사진에 매료되어갔다.
마냥 산이 좋아 산에 올랐었는데, 점점 사진이 좋아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여행을 떠났다.

다들 가는 유럽과 일본을 갔다오고 중국과 캄보디아, 태국 등지를 돌면서 그렇게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여행'이라는 새로운 매력이 성큼 내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고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묘한 매력에 점점 빠져들면서 그렇게 즐겨하던 산행을 뚝 끊어버린 채 본격적으로 사진에 매달리게 되었다.

사진은...
사진은 본격적으로 세상과 교통하는 작은 매개체가 된 것이다.
그건 즐거움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닫혀진 마음이 열렸고 경직되어 있던 감성이 느슨해졌다.
그렇게 세상 속으로 한 발짝 내딛게 되었다.


난 늘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마음을 열면 세상이 보이고
오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세상이 나에게 달려온다고...

 

 

 




 













 









 

 

라씨집에서 만난 서양인들(스웨덴 영감님, 프랑스 젊은 청춘3)들과 잠시 동행이 된다.
레 왕궁과 남걀체모 곰파에 다시 오르기로 한 것.
사실 레 왕궁 입구에서 만난 라마승들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는 의도가 컸다.
레에 도착한 첫날, 혹독한 고산증에 시달리면서도 레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몇 번이나 가뿐 숨을 몰아쉬며 올랐던 레 왕궁 입구에서 우연히 그들을 만났고 따뜻함을 선물받았다.

그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여러차례 레 왕궁 쪽으로 올라오긴 했지만 그 날 이후 그들을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사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르기니 했지만 역시 그들을 다시 볼 수가 없었다.
제대로 작별인사조차 못한다는 아쉬움이 가슴 한 켠에 자리잡았다.

 

 

 









 

 

 

 

 

 

고도(高度)의 맹렬한 햇살이 여과없이 훓고 지나가자,
올드 레(old Leh)의 건조하고 척박한 시가(市街)가 그 낱낱의 발가벗겨진 속살을 저항없이 드러낸다.

여행자는 나즈막한 언덕배기에서 발 아래의 생경한 풍광을 마치 특권처럼 조망한다.
며칠동안 앓아왔다던 고산증의 고통마저 잊게 하는지 사색에 잠긴 그는 오랜 시간동안 미동조차 않는다.

해발 3,500m에서 부는 바람이 룽다를 흩날리게 한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어색하고 불편해 지는 건 아니다.
그곳엔 또다른 삶이 있고,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은근하고 호소력 짙은 설레임과 기대감은 금새 익숙했던 생활과 풍족했던 물질들을 잊게 만든다.
알 수 없는 마력 때문이다.
인에 박힌 타성과 인습의 가면을 한 꺼풀 벗어 던지려는, 또는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기 위한 통과의례의 한 과정...
그것을 갈구하는 강한 자극은 모든 사람의 본성에 깊게 깔려있다.

그 발악의 끝에서 어렵사리 도출해 낸 결론이... 여행이라는 떠남의 행태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조심스레 자문해 본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고, 여전히 그것을 실행에 옮겨왔다.

여행이라는 것은, 어쩌면... 순례자의 화두처럼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어서
그저 바라만 봐도 희열에 들뜨게 하는 여리고 가벼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건 지도 모른다.

떠남이 있으므로써 늘 곁에 있어왔던 익숙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지 절실히 깨닫는 그런 일련의 깨달음 같은 거 말이다.

바람결에 묻은 젊은 프랑스 여행자의 오랜 사색이 그렇게 내 마음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내 존재가 그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어느새 가슴이 부푼다.'

 

 

 

 

 

 

 

 

 

 






 

 

 


스웨덴에서 왔다는 영감님은 1년동안 인도를 여행하고 계셨다.
다람살라의 티벳문화에 깊은 감동을 받으셔서 티벳의 독립을 강력하게 설파하시던 그 정정한 모습은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그 열정이 얼마나 강하셨으면 'free Tibet'이라는 문구가 확연하게 들어오는 티셔츠를 입으셨고,
다람살라에서 구입한 다양한 장신구들이 목과 팔목, 손가락에 가득하셨다.
때때로 곰파로 오를 때에는 힘에 부대끼셨는지 곧잘 쉬기도 하셨지만 거침없이 룽다가 휘날리는 남걀체모 곰파의 바위산까지 오르셨다.


사진을 찍어주고 MP-300으로 뽑은 폴라로이드 그의 사진을 선물로 건냈더니
뜻밖에 어린 아이처럼 상기된 모습으로 'thank you'를 연발하신다.

"여행 다니면서 이런 선물 받아본 건 처음입니다"

오랫동안 혼자 여행하셨으니 꽤 힘들고 외로우셨을 것이다.
그러니,  까만 얼굴의 동양인이 건내는 작은 호의에도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감격을 하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감님은 레 시내로 내려갈 때 보답으로 '커피'를 사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텐진이 운영하는 라라 갤러리로 그를 이끌었다.

 

 

 

 

 

 

 

 

 

 


 

 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니는 프랑스의 젊은 처자 '에스텔'.
그녀는 언제나 유쾌했고 상냥했다.
프랑스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영어를 못한다는 섭입견을 깬 최초의 프랑스인.
속사포처럼 쉴 틈없이 쏘아대는 그녀의 유창한 영어 때문에 오히려 굳어버린 건 내 입이었다.


프랑스 3인방들은 델리에서 스리나가르를 거쳐 이곳 레에 도착했는데,
스리나가르에서 레로 오는 길의 전망은 정말 최고 중의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기회가 되면 그 길을 반드시 가보라고 적극 권유하는 그녀 때문에 루트를 변경해서라도 가볼까 하는 혼란스러움에 빠지기도 했다.

 

 

 

 

 

 

 










△ 다양한 트래킹 장비를 판매하는 상점과 레 시내 


 

조캉사원이 환하게 바라보이는  옥상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서양인 일행들과 함께 했다.
짜이 한 잔과 볶음밥을 주문했지만 자주 가는 '라마유르'와 비교하면 맛이 현격하게 떨어졌다.
말라 비틀어진 볶음밥을 먹으면서도 함께 하는 일행들과의 정담 때문에 오히려 즐거웠다.
혼자 하는 여행이 때론 낭만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의 입장에선,
함께 모여서 떠는 수다는 오히려 흥겨운데다 새로운 여행의 재충전을 위해서는 바람직하다.

 

 

 

 

 

 

 

 

 △ 레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구 레왕궁과 남걀체모 곰파.

그리고 이슬람회당의 첨탑

 

 

 

 



 

△ 멋진 조캉사원 위의 조형물과 설산

 

 

 

 

 

 

 

 

 

 

 

 

 

△ 조캉 사원 옆에 늘 난전을 펼치고 장신구를 팔던 할매와 집없는 개 

 

 

 

 

 

 



△ 망원으로 당겨서 바라본 설산 아래의 어느 곰파

 

 

 




 

 

△ 프랑스 청년은 하교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사진을 찍는다.

부끄러워 하면서도 포즈를 취해주는 아이의 순진한 미소.

 

 

 

 

 


△ 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

 

 

 

 

 

 

△ 레 시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마니차를 돌리며 어디론가 항하는 노파.

독특한 신발이 눈에 띄였다.

 

 

 

 

 

 

 안녕, 에스텔~

그리고 프랑스 친구들,

만나서 반가웠어요.

 

 

 

 

 

 

△ 자주 들렀던 라씨집 주인의 아버지

 

 

 

 

△ 내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함께 묵었던 인도여자 가르

 

 

 

 

 

 

△ 식당 '라마유르의 여주인', 그녀는 네팔인

 

 

 

 

 

 

 

△ 오갈 때마다 들렀던 여행사, 그 여행사의 사장

 

 

 

 

 

 

△ 식당 '라마유르'에서 밥을 먹던 라다크 소녀

 

 

 

 

 

 

△ 매년 델리에서 라다크로 여행을 온다는 빅람과 그의 아내

 

 

 

 

 

 

△ 아름다운 빅람의 아내

 

 

 

 

 

 

△ 친절한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장 하르호

 

 

 

 

 

 

막상 레를 떠나려니 섭섭했다.
늘 빡빡하고 짧은 일정 때문에 좀처럼 긴 시간을 할애해서 긴 시간을 머물지 못했던 나였는데,
레에서 머문 일주일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간접체험할 수 있었던만큼 황금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만큼 정도 많이 든데다 아쉬움도 많이 쌓였다.

인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난 것도 레를 떠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른 탓에 언뜻 봐서는 남자인 줄 알았던 그녀는, 내가 떠나는 마지막날 다람살라에서 막 뚫린 육로를 타고 올라왔다고 했다.
어려 보이는 그녀였지만 꽤 오랫동안 여행을 한 탓에 장기 여행자의 포스가 느껴졌다.
먼저 온 여행자답게 내가 가진 레와 라다크 여행정보를 건내줬고 그녀는 고맙다면서 보답으로 저녁을 샀다.
또 라마유르에서였다.
라마유르에서의 마지막 만찬인 셈이다.
아쉬움이 물컹거리며 씹혔다.

 

그녀를 보내고 정전이 되어 불빛 한 점 없는 거리를 따라 투벅투벅 걸어올라왔다.
이제 정말 사람많은 인도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잔뜩 몸이 부풀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수없이 들었던 인도의 악명들을 떠올리니 컴컴한 암흑처럼 암담하기까지 했다.
일주일동안 깍지 않은 수염이 어느새 까칠까칠해져 있었다.
손전등을 켜고 노트에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를 했다.

델리에서 왔다는 빅람 부부였다.

"형~ 술 한 잔 해요"

내 이름을 묻는 빅람에게 그저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곧잘 그렇게 불렀다.
매년 여름휴가를 델리에서 차를 몰아 이곳으로 온다는 빅람부부도 꽤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어디서 구했는 지 모를 맥주 몇 병과 위스키을 들고 컴컴하게 불꺼진 게스트하우스 거실로 나를 이끌었다.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장인 하르호와 여러 인도인들이 나를 반겼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우리의 짧은 술파티가 시작되었다.
'R'발음을 유난히 굴리는 빅람의 영어 때문에 귀담아 듣지 않으면 놓치기 일쑤였지만,
"My friend, 형"을 외치며 스킨쉽마저 과감하던 술 취한 빅람은 라다크의 아쉬운 밤을 즐거움으로 바꿔놓았다.

"인디아, 아차해(인도 좋아해)"

어설픈 인도말로 그렇게 애기했더니 또 한바탕 웃음이 휘몰고 갔다.
또 네팔출신의 아르호와 함께 부르던 네팔민요 '레 썸 삐리리'도 잊지 못한다.
노래를 불러보라길래 대뜸 '레 썸 삐리리'를 불렀는데, 그 놀라워 하며 신기해 하는 표정은...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던 우리의 합창은 그야말로 감격이었다.
작은 노래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늘 즐거움이었다.


빅람은 델리로 오면 자기에게 전화하라면서 사무실 전화부터 집전화, 핸드폰까지
노트에 빡빡하게 그의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그렇게 라다크에서의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