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떠난 몽골여행 #2 초원 속으로
















이젠 정말 출발이었다.
한국식품이 잔뜩 진열된 M 마트에서 식량과 반찬류를 12만 투그릭(몽골의 화폐단위) 정도 구입하고선 본격적으로 길을 나섰다.
꽤 지체된 탓에 예정되어 있는 바양고비를 못 볼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꿈틀거리긴 했어도
본격적으로 초원으로의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산뜻해졌다.


울란바타르의 외곽지대로 빠져나오자, 도로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움푹 패인 부분이 많은 열악한 도로사정 때문에 곡예운전을 해야 하는데다
함부로 끼여드는 차량 때문에 잉케는 연신 브레이크를 밟는 건 예사였고,

곳곳에서 예고없이 도로로 밀려나오는 사람들의 행렬 때문에 보기만 해도 아찔할 지경으로 도로 사정은 열악했다.
도로 위를 굴러다니는 대부분의 차량은 연식이 10년도 훨씬 넘었을 한국의 중고차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노후화된 차량들이 뿜어내는 극심한 매연은 몽골의 파란 하늘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자욱하고 매캐했다.
진동하는 휘발유 냄새와 풀풀 날리는 먼지가 열린 차창 사이로 스며들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곽지대로 나오자 사람사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동네가 줄줄이 이어졌다.

어수선하고 난잡하며 거미줄처럼 도회의 하늘을 덮은 전신줄에서부터,
공산시대의 잔재처럼 보이는 멋없고 황량하며 네모반듯한 건물들,

열병하듯 둔덕을 빼곡이 채운 달동네의 알룩달룩한 판자집들과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작은 골목길과
난전들이 괜한 흥미를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꼭 닮은 몽골사람들이 그 낯선 거리에서 분주하게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살림살이는 우리보다 훨씬 궁핍해 보였는데, 찌든 가난과 피곤한 삶의 흔적들이 얼굴에서도 묻어났다.
때론 신산스러움으로, 때론 질긴 삶의 질감으로 다가오는 저런 정제되지 않은 풍경들이 왜 이렇게 마음을 끄는걸까...



그러다 얼핏 잠이 들었다.

지난 새벽, 지독한 한기 때문에 잠을 설친 탓인지, 따뜻한 오후가 주는 이 나른함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연신 하품을 하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어느새 푸르공의 거친 엔진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뒤에 계시던 이 선생님이 나를 깨웠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니, 어느새 도회를 빠져나온 차가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잠시 잠든 사이, 거짓말처럼 세상의 풍경이 변해 있었다.


멀리서, 망원렌즈를 이용해 목동과 그들의 양을 찍기만 했다.

역광을 받아 빛나는 뭉실뭉실한 양털이 살짝 진 그늘과 함께 멋진 패턴을 만들어 냈다.
양을 모는 목동들의 활기찬 실루엣과 그것들-말과 양-이 일으키는 뽀얀 먼지는 사진의 좋은 소재였기에 멀리 떨어져 셔터만 눌러댔다.

그들과의 거리감... 아니, 가슴 답답할 정도로 요원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다가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낯선 곳에 처음 내렸을 때의 설레는 기대감과는 달리, 세포 가득 팽배해 있는 몹쓸 긴장감이 그들과의 조우를 애써 막고 있었다.
게다가 말을 탄 목동들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도 그런 작용을 더욱 부추겼던 것 같다.
말 탄 몽골 남자들에게서 느꼈을 고려인들의 아득한 공포와 두려움이 전이된 탓일까.
비록 언어는 달라도 마음을 열고 서로 이해하려 든다면 누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첫 마음을 열기가 생각만큼 녹녹치 않았다.  늘 그 첫 발이 문제였다.






























































하르호른으로 가는 길은 포장도로였다. 아니, 그나마 포장도로였다.
출발 무렵엔, 중간중간 도로가 유실되기는 했어도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UB를 벗어나면 벗어날 수록, 하르호른 쪽으로 가면 갈 수록 도로상태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군데군데 폭탄을 맞은 것처럼 패여있는 도로는 주행이 불가능해 보였다.


가면 갈 수록 패인 웅덩이는 지뢰밭처럼 자욱해서 운전자 잉케와 우리를 수시로 괴롭혔다.
마치 기막힌 곡예라도 부리듯 요리조리 핸들을 힘겹게 돌리면서도, 잉케는 6~70킬로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핸들을 꺽을 때마다 몸이 좌우로 쏠리는 건 당연했다.
어떤 때는, 열린 창문으로 몸이 튕겨져 나갈까봐 손잡이를  꽉 잡기까지 했다.


노면路面 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서 굳이 패인 부분을 지나지 않더라도 심한 요동과 소음을 끊임없이 양산해 냈고,
엉덩이는 수시로 들썩거렸으며, 알 수 없는 혼돈과 짜증들이 머릿 속을 어지럽게 흔들어 댔다.
머릿 속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가던, 그 정점의 어느 순간이었다.
혼란의 틈바구니 속을 비집고, "통과의례"라는 낱말이 스쳐갔다.


'그래, 어쩌면 우린... 몽골이라는 생소한 나라에 익숙해지기 위해 가벼운 통과의례를 치뤄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신작로가 들어서기 전, 한국의 시골길도 이것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갓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니 불과 몇 십년전이었다. 
조국 근대화와 새마을 운동의 물결이 전국을 강타하자 낙후되고 후미진 산골마을까지 문명이 비집고 들어왔다.


신작로가 들어서는가 싶더니 몇 년후 도로는 깔끔하게 포장되었다. 
소 달구지가 어렵사리 오가던 그 길에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동네사람들은 더이상 높은 재를 넘지 않아도 읍내 5일장을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신작로를 따라 촘촘하게 나무전신주가 세워지더니 이내 낮처럼 환한 전깃불이 우리집까지 들어왔다.


세상이 점점 변하고 있었다.
비록 동네에 한 두대지만 테레비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는데
흑백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신기한 영상에 온 시선과 신경을 빼앗겼다.
더 이상  언덕과 개울가에서 동무들과 뛰어놀지 않아도 될만큼 테레비는 충분히 자극적이었고 유희적이어서
유년의 시간을 뺏기에 충분했다.
추운 겨울밤 아랫목에서 할매가 들려주던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와 동화를  잊기 시작했고
별똥별과 반딧불에 대한 추억마저 희미해져 갔다.


남진의 '님과 함께'라는 유행가를 특유의 모션으로 곧잘 따라부르는 게 유행이었던 시절, 
어른들도 철없는 우리의 노래를 질책하지 않았다.
낭랑한 목소리로 불러대던 아름다운 동요를 대신해서  사랑타령 일색인 유행가가 아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테레비는 어느새 세상 화두의 중심이 되었고 마력처럼 그 특유의 흡인력에 이끌려 우리는 서서히 노예로 전락해 갔다.
문명의 이기가 주는 편리함에 길들여졌고 가난했지만 꿈이 있던 과거는 오랫동안  까마득하게 잊혀져 버렸다.
꿈과 희망의 상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자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기엔 우리의 지각능력은 너무나 미숙해서 금새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기 일쑤였고 거칠고 올곧은 진실은 늘 외면을 당했다.
'물질 만능주의'라는 스펀지가 사람들의 뼛속까지 스며들기 시작했으며  어느새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고 말았다. 
가공된 거짓 픽션들이 세상을 점령했고 어설프고 억지스럽게 짜여진 플롯에 감동하며 심지어는 눈물까지 짜냈다.
남아있던 꿈들이 그렇게 빛을 바랬고 우리는 조급증에 시달리며 '빨리 빨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차의 불편함 쯤이야 마음 먹기에 따라 금새 해소시킬 수 있다.
어떻게 마음 먹느냐에 따라 불쾌가 유쾌로 전환되기도 한다.
늘 어설프게 먹은 마음이  힘들다고 투정부리며 성가시게 치근거렸나 보다.
거친 도로와 푸르공의 허약한 쇼바 때문에 수시로 일어나는 잦은 요동과 소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린 날의 꿈과 가난의 행복을 잃어버린 물질화된 슬픈 한국인의 자화상...


잠시의 불편도 참지 못하는 극성스러운 이기주의가 여기서도 나타났다.

마음을...
옛추억을 떠올리면서 굳어버린 마음을 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