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 로마의 밤거리를 거닐다.










 













예전처럼 전투적으로 관광을 하는 것도 아닌데 나이가 들면 들 수록 하루해가 부쩍 짧다는 생각이 든다. 
일정이 빡빡하다 보니 늘 시간에 부대끼게 되고 긴 이동시간으로 소비되는 시간들도 만만찮다.
많은 곳을 돌아보려는 욕심 때문에 시차적응도 못하고 돌아다녔더니 금새 몸이 피곤해진다.
이래저래 아쉬움과 허전함만 가득 채운 셈이다.
아내와의 추억이 서려있는 과거로의 회귀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자니 함께 하지 못한 아내의 빈자리가 못내 쓸쓸해서 더욱 그럴 지도 모르겠다.

서둘러 짐을 꾸린다.
여전히 눈에 밟히는 토스카나의 풍광이 내내 지워지지 않은 유혹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에우로스타EuroStar의 쾌적한 좌석에 몸을 기대니 짧은 이틀동안의 누적된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메모리카드에 저장된 여행의 흔적들이 차창 밖으로 흔들리며 사라진다.


'여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내가 그렸던 이태리 여행이 정말 이랬던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들이 그 흔들리는 틈새를 비집고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해거름이 진 로마시내는 어느새 어둑해 있다.
테르미니역은 여전히 오가는 수많은 군상들로 북적인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이 곳.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인생이 있고 삶이 녹아있는 이 곳에 다시 내린다.
달콤하게 입맞춤을 나누는 이태리 연인들 곁을 스쳐 지나면서 낯선 여행자가 된 나는 부러운 시선을 흠칫 보낸다.
그들의 열정적이고도 격렬한(?) 사랑표현법이 메마르고 경직된 내겐 생경하게 다가온다.
마른 기침을 두어번 내뱉고는 다시 길을 재촉한다.


야간투어를 위해 한국인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24번 게이트를 지나 긴 회랑같은 복도를 따라 나와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문득 어둡고 눅눅한 습기가 배인 로마의 뒷골목을 마주하게 된다.
밤안개라도 제법 끼였으면 그럴 듯하게 낭만적이었을 골목들은 인적 하나 없이 스산하기만 하다.

저녁식사 시간이 약간 지나긴 했지만  돌아온 나를 위해 사장 내외는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내민다.
공복에 밥 한끼를 뚝딱 해치우니 이제야 살 것 같다.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지 못하는 핸디캡이 있다.
태생적으로 먹을거리에 연연해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라도 그렇겠지만 혼자 먹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습성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극복하기 힘든 '뻘쭘함'은 제법 홀로여행에 단련됐다고 자부하는 내게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 중의 하나다.
특히 여행 초반은 한국에서의 생활패턴이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여행자 생활패턴으로의 전환을 서둘러야 하는데
동행이 없는 나로서는 그 부분을 극복하지 못해 늘 곤욕을 치르곤 한다.


나폴리 민박집에서 새벽에 싸준 도시락과 사과 한 알이 아침식사였다면...
몬테 솔라로에 올라서 먹은 맥주 한 병과 얇은 샌드위치가 점심식사.
기차 안에서 주전부리로 먹었던 칼로리 높은 초콜렛이 전부였으니 하루 활동량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먹은 게 없으니 몸이 따라주질 못하고, 몸이 지치니 여행자체가 귀찮아질 뿐 아니라 쓸데없는 잡념 덩어리들만 머릿속을 들끓는다.
여행 다닐땐 무조건 많이 챙겨 먹어야 한다. 든든하게 먹어놔야 체력도 유지하고 컨디션도 조절할 수 있는데다 많이 다닐 수 있다. 


민박집이 갑자기 분주해진다.

각 여행사에서 주최하는 로마야경 투어를 보기 위해 분주하게 채비를 하기 때문이다.
매직아워Magic Hour가 지난 탓에 제대로 된 야경사진은 찍을 수 없겠지만 배도 든든한데다 막 샤워를 마쳤더니 몸까지 개운해진다.
몹쓸 피곤이 한 방에 물러나고 슬슬 좀이 쑤셔온다.
어차피 로마의 밤거리를 맘껏 쏘다니려면 체질상 맞지 않는 투어보다는 혼자 다니는 게 나을 성 싶어 채비를 한다.
예전에 와봤다는 얄팍한 안도감 때문에 혼자 삼각대를 들고 나서려는데 마침 함께 묵고 있는 여대생 둘이 동참을 원한다.
그녀들과의 즐거운 산책이 그렇게 시작된다.






 

 

 
















































 






"아저씨~!"


B양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처음 듣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왠지 어색하고 낯설다.
아저씨라 불릴만큼 내 얼굴이 곰삭게 비쳐졌다고 생각하니 격세지감과 함께 자격지심이 격랑처럼 밀려온다.


"아저씨라고 하지 말고 오빠라고 부르세요."
ㅡ,.ㅡ;  (이모티콘을 잘 사용하진 않지만 그녀들의 표정을 좀 더 적극적으로 묘사하자면 이 방법밖에는 없는 듯하다. 아무튼 꼭 이랬다.)


"근처에 100년이 넘은 아이스크림집이 있어요. 빠시라는 곳인데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3대 아이스크림집 중의 하나라고 해요.
 세가지 아이스크림을 동시에 먹을 수 있는데 맛이 환상 그 자체예요. 같이 가실래요?"


아, 빠시Fassi. 그래 기억난다.
7년전 그때도, 처음으로 맛본 특유의 풍부한 맛에 매료되어 아내와 함께 수시로 그 집을 들락거렸던 게 떠올랐다.
단지 머릿속에 떠올렸을 뿐인데도 반사신경 때문인지  입안에 침이 흥건하게 고인다. 그래서 기억은 무서운 모양이다.
혀끝에서 살살 녹는 독특한 달콤함을 어떻게 표현할까 마는 로마가 아니면 결코 맛볼 수 없을 젤라또 덕분에 기분은 한층 상승된다.
억제할 수 없는 탐미에 대한 욕구가 꼭 그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젤라또는 서늘한 매력을 발산했다.



유쾌해진 그녀들은 마치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수다를 즐겼고 언어적 표현에 둔감한 경상도 사내는 묵묵히 듣기만 한다.
낯선 타국에서 만나는만큼 애써 가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지도 모른다.
게다가 세상에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청춘들이다 보니 농도짙은 친밀감(?)의 표현을 서스럼없이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다지 웃기지도 않은 애기인데도 말할 때마다 자지러지게 웃고 심각한 애기엔 귀담아 경청하는 그녀들의 표정이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여행이라는 끈끈한 동질감의 고리가 그녀들과 나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녀들의 마음이 햇살처럼 맑고 투명하다.


촛불을 밝힌 야외 테라스엔 연인들이 와인을 기울이고 있는, 익숙지 않은 풍경이 있는 골목을 지날 땐,
사랑하는 사람과 이곳에 다시 와서 꼭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해봐야겠다는 주문을 놓치지 않는다.
수학여행을 온 네덜란드 아이들의 시끌벅적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참 낭만적인 로마의 가을밤이라는 상투적인 멘트도 아끼지 않는다.
그녀들에겐 내가 없는 감성이 있고 쉽게 감동하며 느긋한 여유를 지니고 있다. 그런 그녀들의 순수함이 부럽다.
누구나 다 찍는 흔한 야경 사진보다, 뜻맞는 동행이 있어 오히려 즐거운 여행의 재미가 오히려 소록소록 쌓여가는 느낌이다.


여행초반의 꽉 닫혀있던 마음이 그제서야 빗장을 풀려는 모양이다.
이대로라면 여백이 있는 여행을 즐길 것 같다는 묘한 자신감마저 생긴다.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나보나 광장에 환하게 깔린다.
아름다운 로마의 가을밤이 그렇게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