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 토스카나 지방의 보석, 산 지미냐노









 

 


 

토스카나

 

 

예술과 역사와 뛰어난 자연경관으로 명성 높은 토스카나 지방은 과거와 현재가 어울려 경쾌한 조화를 이뤄낸다.
에트루리아 시대의 성벽과 갸날픈 사이프러스 나무들에 둘러싸인 언덕마을 아래로 펼쳐지는 전원풍경과,
토스카나의 부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궁전들, 민주주의와 자치정부의 오랜 전통을 대변하는 중세의 공화당 등이
어울려 토스카나의 밑그림을 이룬다.


포도밭과 올리브숲 사이에 자리한 시골풍경을 이루는 작은 촌락과 농가 뿐 아니라,
중세 토스카나를 분열시켰던 폭동과 지역간 분쟁을 상징하는 요새화된 빌라와 성들도 포함된다.
위용을 과시하며 주변을 압도하는 여러 성과 저택의 옛주인은 갈릴레오와 같은 뛰어난 과학자들을 후원했던 메디치가문이다.

피렌체와 루카 사이에 위치한 인구 밀집 평원과 북부 토스카나 지방은 도시와 산악지대 사이에 펼쳐진
농경과 산업이 고루 발달된 지역이다.
리보르노와 피사를 중심으로 한 이 산업지역은 현재 토스카나 경제의 중추역할을 맡고 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볐던 피사는 당시 서부 지중해를 지배했으며,
북부 아프리카와의 대규모 무역항로를 개척하여 아라비아의 과학과 예술을 들여왔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는 피사의 세력도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중부 토스카나 중심은 피렌체의 오랜 숙적인 시에나였다.
시에나의 황금기는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시작되었으나,
14세기 페스트 재앙의 발발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이어 1554-1555년 피렌체의 대공격으로 참패를 맛보았다.

산봉우리와 삼림이 주를 이루는 북동부 토스카나 지방은 수도자와 성인들의 은둔지였고,
동부지역은 시간을 초월하여 종교적 극치에 도달한 작품을 창조한 초기 르네상스 화가 피에뜨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고향이기도 하다.

 

 


 

 

 

 

 

 

 

 

 

 

 

 

 

 

 

 

 

 

 

 

 

 

 

 

 

 

 

 

 

 

 

 

 

 

 

 

 

 

 

 

 

 

 

 

 

 

 

 

 

 

 

 

 

 

 

 

 

 

 

 

 

 

 

 

 

 

 

 

 

 

 

 

 

 

 

 

 

 

 

 

 

 

 

 

 

 

 

 

 

 

 

 

 


차 안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우리는 다시 차를 달렸다.
이번에는 무작정 달리는 것보다는 특정 목적지를 정해서 움직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에 동행들이 선뜻 수락했다.
아름다운 중세의 성곽도시로 유명한 '산 지미냐노'가 우리의 다음 목적지였다.


산 지미냐노는 13개의 첨탑들이 하늘 위로 그 위용을 뽐내는 곳으로 중세 성곽도시의 원형을 간직한 곳이다.
북부유럽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주요순례의 행로에 위치한 탓에 12-13세기동안 번영을 누린 이 도시의 귀족들이 세운 첨탑들이다.
그러나, 1348년, 페스트의 창궐과 순례행로가 바뀌는 불운이 찾아들면서 서서히 쇠락했는데 나중에는 성곽의 존속마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그런 탓에 여전히 이곳은 중세의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늘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게 움직였다.
파란하늘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금새 먹구름이 밀려왔고 순풍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 언덕에서는 몸이 날아갈 정도로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구름들 때문에 토스카나 평원은 덤성덤성 버짐처럼 그늘이 생겨났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쉼없이 차를 달리면서도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 나타나기라도 하면 금새 차를 세워 사진을 찍으면서 소중한 시간을 만끽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은 작은 촌락들을 지났고 가끔 눈빛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거운 인생의 짐을 잠시동안 한국에 두고왔다는 홀가분한 기분 때문인지 꽤 수다스러워졌다.
동행들과 인생을 애기하고 사랑을 애기하고 여행을 애기하면서 한적한 토스카나의 국도를 달렸다.
바른 길로 인도하는 네비양의 목소리만 가끔 경청하면서 열어놓은 창문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바람처럼 세상을 떠돌고 싶은데 언제나 묵직한 일상이라는 쇠사슬이 내 발목을 채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세상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경직되고 어색한 한국에서의 내 표정은 금새 사라지고 아이마냥 즐거워하니 말이다.


목적지가 어디면 어떻고 꼭 유적지를 보지 않으면 어떤가.
세상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삶을 슬쩍 훔쳐보면서 내 삶을 돌아보는 것도 꽤 괜찮지 않나 싶다.
여유가 생기면 마음이 느긋해지고 아량이 생기는 법...


그동안 너무 치열하게 살아온 탓에 마음은 꽁꽁 빗장을 걸어잠그고 있었다.
가끔 길을 혼돈하여 다른 길을 헤매기도 하고 무인주유소에서 어떻게 기름을 넣는지 몰라 한참 헤매긴 했어도 결국 여행을 위한 통과의례였다.
안했을 땐 모든 게 힘들 게 보이지만 막상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게 세상 이치다.
시도해보지도 않고 막연히 상상만으로 자신을 틀 안에만 가두려는 어리석음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가보면 얼마나 좋은지 금새 스스로 체득하게 되니 그런 어리석음은 곧 안타까움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단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그런 이유를...

 

여행을 다니면서 그때 그때의 감정에 충실하는 편이다.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어디서 스파게티와 와인으로 식사를 했고 가격이 얼마였고 맛은 어땠으며
식당의 분위기에 대한 기억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단지 표출해낼 수 있는 감정의 깊이들만 일기장 가득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음식이나 그때의 분위기를 통해서 또는 그때 맡았던 냄새를 때문에 가끔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되뇌이기도 하지만,
까다롭지 않은 입맛과 지극히 싸고 서민적인 것을 선호하는 성격 탓에 여행때면 곧잘 그런 것들이 희석되고 만다.


사실 독특한 향신료와 낯선 레시피 때문에 가끔 비호감을 가지는 음식을 접하게 될 때면
한국에서 파는 일반적인 서양음식들(이미 한국화된)에게 오히려 손을 들어주고 싶을 정도니 감히 상상을 하실 수 있으리라.


그러니 내 여행은 늘 단촐할 수밖에 없다.
음식에 대한 집착, 유적지나 이름난 관광지에 대한 집착이 없는데다,
딱히 어디로 가야 한다는 목적지조차 없을 때가 많으니 양념 덜 섞인 밋밋한 맹탕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선 뚜렷한 목적지가 있었다.


바로 토스카나 지방을 차량으로 떠돌면서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토스카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많이 담았으면 그것만큼 금상첨화는 없을테지만
낯선 동행들은 그런 것에 관심조차 없으니 마냥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함께 여행을 하고는 있지만 목적이 다른 동행들 앞에서는 감히 내 주장만 내세울 순 없다.
함께 하는 여행은... 때론 동행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해해주고 따라줘야지 편한 법이다.



풍경사진만 해도 그렇다.
풍경사진은 일출을 전후로 한 시간대와 일몰을 전후로 한 시간대가 가장 좋다.
빛과 색이 풍부하게 살아있는 시간대인데다 아름다운 자연현상들을 덤으로 제공받기 때문이다.

풍경사진은 이런 자연적인 현상들이 조미료처럼 가미되어야 극적인 효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행들은 피곤하고 지친 탓에 새벽시간이면 잠에 곯아 떨어져 있기 일쑤여서 함부로 나가질 못했다.
가까운 시내 정도야 산보 삼아서 걸어다니곤 했지만 내가 원하는 곳은 가까운 시내가 아니라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려있을 이름모를 토스카나의 벌판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것이 안타까웠다.
토스카나의 겉모습만 훑고 가는 듯한 안타까움의 절정, 그 씁쓸함을 내내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속살은 남겨두고 피상적인 아름다움만 담아가기 때문에 실체를 알 수 없는  가슴 떨리는 안타까움이 나를 사로 잡았다.



다음엔, 다음에 이곳에 오게 되면 더 좋은 여행을 해야지...
그렇게 되뇌이면서도 기약하는 그 '다음'이 과연 돌아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갈 곳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가보고 싶은 곳과 방문 이유만 조목조목 나열해도 A4용지 몇 장에 빼곡하게 옮겨놓을 정도니
여행에 대한 욕심만 자글자글하게 내 뱃속을 채우고 있다.
여행은 하면 할 수록 집착과 갈증처럼 나를 사진으로 몰아넣는다.

아름다운 풍광은 물론이고 거칠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있는 그대로를 카메라에 담고 싶어졌다.
카메라에 의해 다소 왜곡되기는 했어도 내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찍는 작업은 그만큼 흥미로웠다.
여행과 사진, 그리고 삶과 시선...


그 작은 틀안에서 내 생각이 끊임없이 윤회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라도 세상의 작은 일면을 내 카메라로 담았다는 것이다.
카메라로 담은 세상은 곧  내 생각의 다른 언어이기도 하거니와 감춰진 내 미학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작은 여행의 날들동안만큼은 그렇게 생각했다는 기록의 흔적인 셈이다.
그래서 여행사진은 그만큼 소중하다.


내가 끄적거린 나부랑이 글보다도 가식이 없는데다 왜곡되지 않아서 소중한 추억으로 기록될 수 있으리라.
바람부는 산 지미냐노의 그 언덕에 서서 나는 오랫동안 토스카나 지방을 내려다보았다.
올리브와 포토밭이 언덕배기를 가득 매운 이국적인 풍광의 산 지미냐노.
흔히들 토스카나의 보석이라 불리우는 산 지미냐노의 오래된 성곽 위에서 생각은 바람을 타고 그렇게 흘러갔다.



여행을 왔어도 여행을 그리워 하듯, 여행을 왔어도 또다른 여행계획을 세웠다.
내 여린 몸뚱아리를 날릴 정도로 강하게 불어오는 그 바람을 맞으면서 나도 바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자유로운 영혼이길 바랬지만 현실과 일상은 늘 족쇄처럼 나를 옮아맸고 나는 감정을 숨기면서까지 생활에 충실해야 했다.
절제되고 얽매여진 채로 때로는 가식적인 웃음을 내뱉고 시간의 노예가 된 채 본성을 상실해갔다.
바람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은 그렇게 바람처럼 흩어졌고 나는 일상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단지...
바람이 되고 싶다는 아득한 꿈만 꾼 채 잠시 날개를 쉬어야 한다.
언젠가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면 과연 시詩를 쓸 수 있을까.
유치한 유행가 가사같지만
그래도 가슴을 파고드는 눈물처럼 감성어린 그런 시어(詩語)가 간절했다.
내 가슴은 어느새 메말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