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행] 비오는 날의 카트만두



 


도 형님은 중간에서 만났는데, 아무리 찾아도 육규씨가 보이질 않았다.

입구 쪽에서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나타나질 않았다.

혹시 먼저 간 것은 아닐까.
도 형님이나 나나 사진 찍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소형 디지털 카메라만 가지고 있는 육규씨에겐 이런 풍경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으리라.
훌쩍 다른 장소로 이동해버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자 우리도 다음 장소인 보더나트 쪽으로 떠나기로 했다.

보더나트는 유명한 티벳 불교사원이라고 했다.
흔히들 몽키템플이라고 불리우는 스와얌부나트와 함께 카트만두의 대표적인 불교사원이 바로 보더나트인데
수많은 티벳탄들이 중국에 강제로 예속된 그들의 조국, 티벳의 독립을 기원하며 오체투지를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짧은 여정 때문에 이동은 늘 택시였다.
육규씨가 내내 마음에 걸렸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곧잘 이런 식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어왔기 때문에 미련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여행 스타일과 맞지 않으면 동행과 잠시 헤어져 자신만의 여행을 즐기는 게 솔직히 바람직한 방법이리라,
어차피 숙소에서 만날테니 중도에 별탈없이 무사하기만을 바래야 했다.

멀리서 보아도 거대한 스투파(탑)의 위용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바로 티벳탄들의 성소로 불리우는 보더나트였다.
왠일인지 조금전부터 차가 꽉 막히더니 차는 꼼짝달싹도 않은 채 도로가에 멈춰서고 말았다..
택시기사는 걸어가는 게 오히려 빠를 것이라며 보더나트를 손으로 가르켰고 우리는 주저없이 택시에서 내려 거리로 나섰다.
한참을 가다보니 몇 명의 청년들이  경찰에게 잡힌 채 어디론가 끌려가는 게 보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가는 청년들은 몇 번이나 고함을 지르며 반항을 했고 그때마다 경찰들의 가혹한 몽둥이가 청년들의 여린 몽뚱아리를 덮쳤다.
악화일로를 걷는 경제만큼이나 네팔의 정국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왕정파와 마오(공산당)들간의 분쟁으로 네팔의 곳곳은 수시로 데모와 스트라이크가 벌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혼돈의 시대였다.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마오들의 왕정에 대한 투쟁도 격렬했지만 그것을 억압하는 정권의 탄압은 더욱 졸렬하고 강압적이었다.
혼돈이 일상처럼 고착화되어 버린 탓인지 사람들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신랑, 신부를 배웅하는 가족들 또는 친구들...
하지만, 정작 신랑 신부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박타푸르에서~

 

 

 

 

 

 

 

 

 

 

박타푸르의 어느 골목~
노인과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그 한가로운 풍경...


 

 

 

 

 

 

 

 

 

 

저 과일 장수의 어깨가 왜 저렇게 애처럽게 보였을까.
까만 피부에서 느껴지는 가난...


 

 

 

 

 

 

 

 

 

박타푸르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예품 가게~


 

 

 

 

 

 

 

 

 

 

광장...
나는 광각렌즈가 필요했다.
광각렌즈가 너무 필요했는데 무겁다는 이유때문에 들고 가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몇 배 무거운 망원렌즈는 빠뜨리지 않고 들고 갔다.

그 엄청난 모순을 극복하지 못해 나는 늘 광각렌즈에 목말라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광장을 조망하기 쉬워서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한 카페...
하지만, 맛은 그다지 없다고 한다.


 

 

 

 

 

 

 

 

 

 

 

박타푸르의 입구 또는 출구...
외국인들이 들어오면, 저 앞에 진치고 있는 어설픈 가이들들이 마구 꼬셔댔다.

 

 

 

 

 

 

 

 

 

보더나트로 가던 길에서 찍은 어느 집 앞...
색감은 밝고 아름다운데 왠지 모르게 허허로웠다.

그 허허로움의 정체가...?

 

 

 

 

 

 

 

 

 

그 유명한 보더나트의 스투파와 펄럭이는 룽다들....

 

 

 

 

 

 

 

 

 

좀더 망원으로 당겨서 찍으면 이런 모습이다.

 

 

 

 

 

 

 

 

그걸 좀더 당겨서 찍으면 이런 모습....
내게도 지혜를 보시하소서~

 

 

 

 

 

 

 

 

 


코라를 돌고 있는 티벳탄들...
독립을 향한 그들의 염원이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지길...

Free Tibet~!

 

 







 


많은 티벳탄들과 티벳 승려들이 어디론가 분주하게 오갔다.
조국을 중국에게 빼앗기고 네팔과 인도 등을 떠돌며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슬픈 역사와 숙명 같은 삶에 목이 매여왔다.
그 힘든 오체투지를 하면서 코라를 도는 이유도 어쩌면 티벳탄들의 간절한 독립에의 염원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 번은 방문하게 될 티벳이라고 생각했지만 먼 이국에서의 뜻하지 않은 이런 조우는 왠지 가슴을 여미게 했다.
어느새 가는 빗줄기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보더나트의 첫인상은 일단 생각보다는 웅장하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스투파에 그려진 지혜의 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회색빛으로 낮게 드리워져 있었고 스투파 주변으로 둘러쳐진 수많은 룽다가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며 휘날렸다 .
‘지혜의 눈’이 내 가슴 속을 꿰뚫어보듯 서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스투파를 중심으로 많은 티벳탄들이 작은 마니차를 돌리며 코라를 돌았다.
벽안의 서양인들도 덩달아 돌고 있었으며 우리도 그 대열에 합류해서 느린 걸음으로 돌았다.
그렇게 걷다가 티벳탄들처럼 벽에 달린 거대한 마니차를 돌렸다.


마니차가 돌 때마다 위에 붙은 종에서는 ‘데그러렁’하는 작은 소리가 났다.
구르는 듯한  종소리가 ‘툭’하고 심장에 툭하고 꽂혔다.
슬픈 티벳탄들의 소리없는 아우성같은 울부짖음이 심장 끝에서 울려퍼졌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짙게 내려앉은 회색빛 하늘이,
간헐적으로 빗줄기를 뿌려대는 그 무거운 하늘이…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스투파 쪽으로 올라가 보았다. 
‘옴메니밧메흠’을 외치는 어린 승려들의 불경소리만 주변에 가득 할 뿐 나와 몇몇 서양인 관광객들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둘러본 뒤 그곳을 빠져 나와서는 이번에는 망원렌즈로 바꿔 끼웠다.
코라를 돌고 있는 티벳탄들의 모습을 더 가깝게 담아보기 위해서였다.
열중하고 있는 그들을 굳이 방해하지 않으면서 촬영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이 방법밖에 없는 듯했다.

날씨가 흐려 핸드블러(손떨림)가 생겼다.
Iso를 올리고 is(손떨림 방지장치)를 켜긴 했지만 움직이는 그들을 포착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몇 컷을 날렸다.



 

 

 

 

 


보더나트의 상징인 제 3의 눈...
그 눈이 가리키는 곳은... 
 

 

 

 

 

 

 

 

 

 

 


육규씨의 뒷모습과
코라를 돌고 있는 티벳탄 할머니...
아...할머니...
 

 

 

 

 

 

 

 

 


비를 맞으면서도, 그들은 코라를 돌고 또 돌았다.

그들을 따라 우리도 돌고 돌았다.


 

 

 

 

 

 

 

 

 

 

비가 많이 내리자 자리를 접는 티벳탄 노인.
아마도 오늘 장사는 끝인가 보다.

 

 

 

 

 

 

 

 

 

 

잠시동안 우리와 합석했던 캐나다 할머니...
즐거운 여행 하셨죠?

 








 


그때였다. 멀리서 달려오는 육규씨의 모습이 보였다.

박타푸르에서 헤어져서는 한참 궁금해 하고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결국 그도 보더나트로 달려왔던 것이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공예품 가게에서 물건을 흥정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유독 나무로 된 공예품에 집착하는 육규씨였고 흥정실력 또한 만만찮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나마 이렇게 잘 찾아줘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 고마웠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점심시간을 넘겨서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는데 육규씨도 만났고 빗줄기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으니,
그걸 핑계 삼아 보더나트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들어섰다.
의외로 그 작은 카페 안은 서양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간단하게 커피와 케잌을 주문했고 우리는 서양인 할머니 혼자 앉은 자리에 양해를 얻어 합석을 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날씨가 많이 추워진 듯 했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자 배 속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새벽부터 모질게 다녔더니 꽤나 피곤했었나 보다.

게다가 오랜만에 커피다운 커피를 마셨더니 착 가라앉았던 우울했던 기분이 빗물에 씻겨내려가는 듯 했다.
따뜻함과 더불어 노곤노곤한 피로도 함께 몰려 왔다.
스멀스멀 눈이 감길 정도였다.

벌써 내일이면 여행의 끝이니 이제 여행의 막바지인 셈이었다.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가는 구나.
엊그제 여기 온 것 같은데 너무 짧은 여행,그래서 여행의 끝은 늘 아쉽기만 했다.
어딜 가나 다정다감한 성격의 도 형님이 옆에 앉은 서양인 할머니와 애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서는 듣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앉았다.

장엄한 빗소리에 묻혀 대화소리가 자꾸 끊긴 채 들려왔다.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혼자 여행을 오셨다는 할머니…
그 연세에 홀로 여행이시라니 정말 대단하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토론토에서 유학 중이라고 했더니 한껏 친밀함을 표시하시면서 꼭 아름다운 캐나다를 방문해보라고 권유하셨다.

토박토박 어렵지 않은 영어로 말씀하시는 걸 보면 교육관련 업무를 맡지 않으셨나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영어는 쉽고 설득력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웃을 수 있을까.

일관된 시선과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굳어버린 편견으로 나만의 즐거움만 추구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어있지 않을까.


 

 

 

 

 

 

 

 

타멜거리엔 여전히 마오들의 데모가 한창이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일명 몽키템플이라고 불리우는 스와얌부나트였지만

아무래도 지금깥이 궂은 날씨 속에서는 포기하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일행들과 협의를 거쳐, 일단 오늘의 일정은 이것으로 종료하기로 하고 타멜거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지었다.
할머니에게 간단한 작별인사를 하고 육규씨가 미리 대절해 놓은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한 뒤 보더나트로 왔다는데 카페에서 오래 머문 탓에 시간이 꽤 지체되어 있었다.
다행히 택시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멜거리로 돌아온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쇼핑을 하는데 할애했다.
워낙 쇼핑에는 관심이 없는 성격인지라 울긋불긋한 잠바 하나와 짝퉁 노스페이스 바지 하나,
그리고 레섬삐리리 등 네팔의 민요가 수록되어 있는 CD 2개가 전부였지만 도 형님과 육규씨는 꽤 많은 물품을 구매하고 있었다.


타멜에서의 마지막 밤, 아니 네팔에서의 밤이라 타멜거리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맛있는 된장찌개로 포식을 하고,
일찌감치 숙소의 식당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었다.
하나, 둘 배낭 여행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여행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안주 삼아 참 많은 애기를 나눌 수 있었다.
1년 정도의 장기여행 중이라는 아가씨를 제외하면 인도여행 도중에 잠시 네팔을 들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긴 그 아가씨조차도 인도에서 네팔로 넘어왔다고 하니 거의 대부분이 인도를 거쳐 온 셈이었다.
‘인도여행, 어땠어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너무 좋았다라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뭐가 그렇게 좋았어요?’라고 다시 물으면 ‘싼 물가가 너무 좋았고요…’로 시작되는 그들의 일관된 답변에 웃음이 났다.


언젠가는 꼭 가봐야 할 인도…
왜 이렇게 세상은 가봐야 할 곳이 많은 것인가.
갈 곳은 많고 시간과 돈은 없으니 그게 너무 아쉬울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웃음이 퍼져가던 카트만두의 늦은 밤.
약한 전등불 아래 비치는 가느다란 빗줄기의 사선이 묘한 흔들림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