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여행] 을씨년스럽던 레에서의 하루








날이 계속해서 흐리고 을씨년스럽다.
밤새 추위에 뒤척여서 그런지 몸도 개운하지 않았다.
날만 좋으면 레 일대의 아름다운 곳을 찾아다니려고 했는데, 날씨가 조장한 우울증이 그것마저 포기하게 만들었다.

벌써 며칠 째, 한국인을 보지 못했다.
어설픈 영어로 현지인들과 의사소통을 하지만,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한국말이 문득 그리웠다.
그렇게 아둥바둥 살다가, 한국을 떠나온 지 불과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한국말이 그립다니 나도 참 아이러니했지만, 익숙한 것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병이었다.

다시 남걀 체모 곰파에 올랐다.

여전히 오르는 길은 힘들었다.
몇 번이나 가픈 숨을 몰아쉰 뒤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오색풍마(룽다)가 바람에 흩날리는 그 곳.

잿빛으로 드리워진 하늘의 구름 때문에 비장한 분위기마저 들었다.
그렇찮아도 허허롭던 레 시내가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에 더욱 허허롭게 보였다.





 

 



오색풍마(룽다)가 휘날리는 남걀체모 곰파













냠걀체모 곰파를 내려가는 순례자들






며칠 전, 저곳엔 까치가 앉아서 울고 있었는데...
그나마 까치마저 어디론가 떠나버린 냠걀체모 곰파는 바람소리만이 흥건하게 떠돌고 있었다.






















오랫동안 미동도 없이 그곳에 앉아서 내려가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바짝 마른 황톳길을 걸을 때마다 뿌연 먼지가 날렸다.

낯선 길 위의 사람들...







인도 관광객을 태우고 온 라다키 운전사.












저 연못 너머에 내가 묵었던 GH가 있다.


























을씨년스러운 레의 풍경은 거칠고 투박했다.
그렇찮아도 황량한 레의 풍경을 덧칠하다 더욱 황량하게 만들었고, 몰입된 나의 우울을 조장하고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 높은 곳에 우뚝 멈춰서서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내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몇 시간동안 경직된 내 몸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었다.
















 

 




남걀 체모 곰파를 내려오다 만난 한 소년.
소년이라고 부르기엔 등치가 크지만, 눈빛만큼은 영락없이 소년이었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들고 가던 물통을 자리에 내려놓으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열심히 공부하며 꿈을 키워야 할 어린 나이에 생활현장에 끼여든 그의 가난이 애처럽게 느껴지지만
순박한 그의 눈빛 때문에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굿굿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녀석에게 사진을 뽑아서 건내주자, 느닷없이 'Sir'라는 호칭까지 붙이는 게 아닌가.

"Thank you very much, sir"

그러면서,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일하다 나온 소년의 손은 거친데다 지저분하긴 했지만 마주잡은 그의 손바닥에서 전이되는 온기는 참 따뜻했다.

 

 

 






 

 

 


소년과 같이 일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멀리서 줌으로 당겨 찍었다.

사진을 받아든 소년은 연신 싱글벙글하며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는데
일행들에게로 다가가면서 한껏 자랑을 늘어놓았다.
비록 말귀 하나하나까지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느낌으로도 충분히 뜻이 전달되어왔다.

 

 

 

 

 

 

 

 

 








 

오후 6시의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샹카르 곰파(Sankar Gompa)로 향했다.
숙소에서 가깝기 때문에 쉬엄쉬엄 걸어서 올라가도 2~30분이면 도착했다.
가다가 길이 헷갈리면 '상카르 곰파?'라고 물으면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라다키들...

많은 관광객으로 붐빌 줄 알았는데, 곰파엔 나를 비롯해 인도 관광객 몇 명이 고작이었다.
라마(스님)도 보이질 않아 날을 잘못 잡았나 착각할 정도로 한산했다.
하긴, 레의 많은 식당과 GH가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 관광철이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리라.

레 공항에 도착해서 택시 기사에게 '한국인이 많이 묵는 숙소'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대뜸 그는 '당신이 여기에 처음 온 한국인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섣부른 기대가 실망을 초래하는 법.

시간이 되자 붉은 색 법의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한 라마(스님)가 나타났다.
빗장이 굳게 쳐진 문을 열며, 주춤거리는 내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울긋불긋한 천으로 장식된 문, 오래되어 탈색된 문의 붉은 색감과 상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비밀의 문같아 조심스러웠다.



 

 

 

 

 

 

 

 








 

불을 켜자, 붉은 계통의 원색으로 곱게 치장한 법당이 마치 새색시마냥 수줍게 드러났다.
불을 켰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실내는 어두웠고, iso를 3,200까지 올리고서야 겨우 안정된 셔터스피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워서 그런지 몰라도 음산한 분위기였다.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법당 안.
20루피를 보시하자, 라마는 영수증을 끊어주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내 곁에 서 있는 몇몇 인도인 관광객들은 법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자리를 뜨고 법당엔 나와 라마만이 남게 되었다.
라마가 준비하는 동안, 법당의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담는데...
그 화려한 색감이 눈길을 현혹시킬 정도였다.

몇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이미 티벳불교를 잠시 접한 적이 있었다.
몽골에서도 그랬고, 네팔에서도 그랬다.
그 색감이 주는 화려함 때문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할 정도로 흥분한 기억이 났다.
그런데도 정작, 여전히 티벳은 가보질 못했다.

몇 번, 계획을 세우긴 했는데 그때마다 무산되어 버리니 아무래도 티벳과의 인연은 당분간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인도여행을 계획하기 이전에 내 여행 목적지는 티벳이었다.
몇 군데 사이트에 들어가서 준비를 하는 중에, 느닷없이 '티벳사태'라는 난기류를 만나고 말았다.
사태는 쉽게 진전되지 않았고, 중국정부는 관광객들에 입경을 불허한다는 조치를 취해버렸다.
그때의 안타까움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Free Tibet~!"

 

 



 

 













 


작은 법당 안엔 라마와 나...
둘만 존재했다.
그의 숨소리와 체취까지 느껴질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는 영어로 짧게 말을 하고는 독경을 읊기 시작했다.

법문을 보면서 장단에 맞춰 독경을 외는 그의 목소리가 조용한 법당을 가득 채워 나갔다.
신비로운 장단이었다.
가끔 꽹가리 소리가 나는 요란한 악기와 북을 두들기며 그 장단에 흥을 가미했다.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시늉하자, 후레쉬만 터뜨리지 않으면 된다는 몸짓을 보여주었다.

허락을 얻은 까닭에 iso를 최상으로 올려놓고 조리개를 최대개방으로 세팅한 상태에서 사진을 찍었다.

작은 LCD로 확인해 보니, 노이즈가 자글자글했다.
85mm f1.2 렌즈는 최대개방에서 선예도가 많이 떨어진다는 것도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무슨 대수겠는가.

어느새 공감대를 형성한 라마와 나.
라마는 자기 곁으로 다가오라고 손짓했고 나는 주저없이 다가가 그의 행동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아갔다.
라마가 읊어주는 신비로운 염불소리와 제법 신명나는 장단에 한껏 매료되어 버렸다.

20분 남짓 계속된 법회는 아쉬움 속에 끝이 났다.
마지막 인사로 그에게 사진 하나를 출력해줬고 그는 내일부터 '부처님 오신 날'이라면서 이 곰파에서 웅대한 법회가 있다는 것을 귓뜸으로 알려줬다.

소중한 시간들...


 

 

 

 

 

 



날이 어둑해져 가는데도 아이들은 여전히 크리켓 놀이에 흠뻑 빠져있었다.

신이 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작은 돌담길 속에 가득했다.
잠시 길을 멈추고 아이들의 놀이에 지켜보았다.

한 번씩 카메라를 들어 아이들의 놀이를 담을 땐 소년들은 마치 의기양양한 전사처럼 우쭐댔다.
뭔가에 열중한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일테지...

또래보다 약간 어린 소년이 담장 너머에서 물끄러미 놀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이 때문에 또래집단에 끼지 못했는지 눈가엔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런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부끄러운 지 한켠으로 숨어버리는 아이.
겨우내 튼 볼이 왠지 어린 날의 우리들을 연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