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에서의 내 영어실력은,'20분영어'?





 





짧지만 길었던 토스카나 여행이 그렇게 끝이 났다.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두웠던 숙원 하나가 그제서야 이루어졌다는 뿌듯한 느낌이 여린 가슴을 충만하게 했다.
토스카나를 여행하는 내내, 정말 한 시도 시선을 바깥으로 두지 않았던 적이 없을 정도였다.
토스카나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고 쪽빛처럼 푸르던 토스카나의 하늘을 마음껏 쳐다봤으며,
따뜻한 토스카나의 태양이 빚어낸 달콤한 와인에 한껏 취하기도 했었다.



비록 3일동안의 짧은 인연이긴 했지만 동행들과도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해야 했다.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90여일동안 유럽일대를 여행하는 젊은 남자 C는 스위스로 떠났고,
독일에 교환학생으로 유학 온 여대생 K는 다시 독일로 떠났다.
나는 얼마남지 않은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여정을 즐기기 위해 베네치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각자의 제 갈 길로 뿔뿔히 흩어졌다.



또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혼자인 것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내 여행은 늘 혼자였고, 혼자 있을 때만큼은 철저하게 주어진 고독과 사색을 즐기는 요령이 생겼다.
음악을 들으면서 노트에 뭔가를 가득 끄적거리기도 했고 그것도 심심해지면 만화를 그려서 스스로의 시간을 만들어 갔다.
알 수 없는 상념 덩어리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채우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차장만 바라보기도 했다.



그때,  앞자리에 마주앉은 한 중년 여성이 '어디에서 왔냐'며 말을 걸어왔다.
차분하고 알아듣기 쉬운 영어였다.
앞자리의 여성은 내 옆에 앉은 노년의 남자와 한 팀으로 보였는데  남자에게 신문의 퍼즐을 풀게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탈리아어로 이루어진 일종의  단어퍼즐 게임이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조용하고 나긋한 어투로 뭔가를 설명하는 걸로 봐서는
학교(또는 교육기관) 선생님과 제자사이의 관계처럼 어느 정도 위계질서 잡혀있는 듯이 보였는데,
아무래도 남자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고 있는 듯 했다.


'대한민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녀는 독일에서 왔다며 자신을 소개했고 남자는 미국인이라며 제스춰를 보냈다.
영어가 너무 유창하다고 했더니 영어를 가르키는 학교 선생님이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독일인이면서도 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치고 또 노년의 남자에게는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는 걸로 봐서는
상당한 수준의 이탈리아어를 구사하고 있는 게 분명할테니 그녀를 '언어의 달인' 쯤으로 부르고 싶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탈리아어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녀의 영어발음만 들어도 그녀의 직업과 성품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녀와 말동무가 되어 영어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거의 말할 기회가 없어서 알고 있는 영어조차도 이제는 곧잘 잊어버린다고 하자,
영어는, 아니 언어는 반복에 필요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듣고 말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라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원론적인 것을 모르는 바은 아니지만 한국이라는 사회 체계 속에 바쁘게 돌아다니며 살다보면 영어를 말할 기회는 거의 없다.
한국어로 대화를 나눠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한글로 씌여진 활자의 글들을 읽으며 한국어로만 생각을 하다 보니
영어(또는 다른 나라 언어)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1년에 한 두 번 떠나오는 여행이 아니면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는 영어 사용빈도가 확연히 떨어지다 보니 여행 중에 가졌던 긴박감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나마 짬을 내서 영어 학원을 다니던가 따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것도 늘 바쁘다는 핑계로 공부는 뒷전이기 마련인데,
산적한 업무도 처리해야 하고, 가족의 대소사도 살펴야 하고, 가끔 사진출사에도 참석해야 하니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야 할 순위는 늘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인내와 끈기가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집중력 저하도 한 몫을 차지했다..
아무리 집중해서 표현법을 몇 시간동안 외워보곤 했지만 산만해진 두뇌 속으로 입력되는 단어의 수는 극히 미미했다.
그나마 알고 있던 영어단어도 어느새 가물가물하게 잊혀져 갔고, 즐겨쓰던 표현마저도 생경하게 되어버렸다.
이래저래 영어공부는 내 오랜 과제고 숙원이기는 했지만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영어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끊임없이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방법을 몰라 늘 배회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여행을 끝마치면 푸념처럼 '한국으로 돌아가면  꼭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지'라며 뇌까리는 나는 늘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내 영어실력(특히 스피킹)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내리자면,  '20분 영어'라는 애매한 말로 단정지을 수 있다.
적어도 20분 동안만큼은 어느 정도 영어라는 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 인데,
이는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존영어'만 가능하다는 말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사실 한국 여행자가 많은 지역에서는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거의 없지만 적어도 한국 여행자가 흔하지 않은 지역을 여행하거나
또는 그 지역의 상세한 여행정보를 얻어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영어로만 의사소통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
기본적인 인사정도야 구사한다 치더라도 이동하는 방법이나 숙박시설, 볼거리나 먹거리에 대한 정보는 여행자들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어서 하나라도 놓칠 경우 자칫 위험한(또는 터무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얼마전에 다녀온 동티벳의 랑무스지역이나 신장의 카나스 호수 쪽에 대한 정보는
내가 가진 한국가이드북에는 나와 있지도 않아서 동행했던 서양인 여행자들의 가이드북과 정보를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유용한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영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20분'이 한계인 내 영어구사능력으로서는 의사소통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더듬거리는 발음으로 몇 개의 단어만 겨우 나열해서 대화를 풀어나가야 했던 어설픈 내 영어 실력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이야기 전개가 다양한 주제로 흘러가게 되면, 내 '20분 영어'는 모래 위에 지은 반석처럼 한 순간에 와그르르 무너지고 만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나의 '20분 영어'로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해서 여행을 하는데 그다지 불편하지 않지만
꼭 복잡한 상황이 닥치게 되면 '나의 20분 영어'는 효력을 상실하고 힘든 곤경의 순간 속으로 빠지게 하는 끔찍한 마력(?)이 있다.


중국의 실크로드를 여행할 때였다.

어느 도시로 이동해야 하는데 잘못 이해한 정보로 말미암아 그만 시각을 착각하고 늦게 터미날로 나간 것이다.
하루에 한 편 다닌다는 버스는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 떠난 여자와 버스는 손 흔들어도 소용없다고 했던가.
빠듯한 여정인데도 불구하고 하릴없이 꼬박 하루를 더 기다려 버스를 타야 했던 뼈아픈 추억이 떠올랐다.

워낙 영어로 된 숫자에 약한 면을 보이는 것도 있었지만

정보를 전해준 미국청년의 속사포같은 말투 때문에 그만 정신이 아득하게 경직되고 말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나의 한계시간인 20분을 훨씬 초과한 것은 물론이고, 내 영어실력을 과대평가한 그의 거침없는 대화 속도에 잔뜩 주눅들고 말았다.
대화의 요지였던 버스시간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듣기실력으로 인해 살짝 어긋난 채 머리에 저장되었다.



회한같이 밀려오는 서글픈 자신의 영어능력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하고 그럴 때마다 주먹을 불끈 쥐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뒤.
땅을 치고 후회해봐도 본격적인 고생의 길로 접어드는 걸 막을 방도가 없었으니 그저 하루를 뜬구름처럼 허송세월하며 보내고 말았다.
머리가 나쁘면 수족이 고생한다는 말이 비로소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다짐처럼 '돌아가면 반드시 영어공부를 한다'라는 말로 의지를 불태우지만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공염불로 전락해 버린다.
어쩌면 내 끈기없음의 발로이며 핑계에 불과한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나마 약간의 대화라도 가능하다는 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마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자문해본다.
영어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만큼은 패턴처럼 끊임없이 되풀이되니 스스로에게도 애닮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영어에 대한 갈증은 그저 갈증으로 끝날 공산이 농후하게 짙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라도 익힌 [생존영어]가 여행의 횟수를 거듭할 수록 요령이 되어 몸에 붙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적어온 베네치아의 한 민박집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지만 방이 없다고 했다.
성수기가 아니라서 내 한 몸 누일 공간은 어디에도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지만,
그래도 허접한 베네치아의 호텔보다는 한국인(또는 조선인) 민박집이 훨씬 편했기 때문에 아쉬움이 살짝 들었다.
혹시 추천해줄 곳이 없냐고 묻자 '미자이모'라는 조선족 민박집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잠시 쉴 공간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듯 마음이 편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오는 기차안에서부터 언뜻 몇 방울 긋기 시작하던 빗줄기는
베네치아의 산타루치아 역에 내리니 흡사 소나기같이 거세게 퍼부었다.
현금인출기에서 약간의 유로를 찾고는 다시 역앞으로 나서니,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 앞의 작은 광장으로는 수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왼쪽으로 직진하다보면 아내와 묵었던 작은 호텔이 나올 것이고, 거기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자주 들렀던 중국집이 나올 것이다.
문득 까마득하게 잃혀졌던 기억들이 그제서야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뚜렷한 윤곽을 그려냈다.
다시 베네치아로 왔다. 그때는 아내와 함께였지만 지금은 이렇게 혼자였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아니면 혼자라는 생각 때문에 그랬는지...성격답지 않게 감상적으로 변해있었다.


여행 중에 비가 내리면 활동의 제약을 많이 받기 때문에 꽤 성가시다.
비를 맞는다고 여행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구질구질하게 내리는 비 때문에 이동하는 자체가 귀찮아진다.
우아하게 까페에 앉아 커피 한 잔 하면서 비오는 날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나마 제법 운치라도 있지만,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둘러매고 혹시 카메라라도 젖을까봐 노심초사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면 나중엔 내리는 비가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짧은 일정으로 돌아다니는 처지에 까페에 틀어박혀 처량하게 세상만 보는 것은 왠지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면 어떤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다녀야 비오는 세상의 풍경을 담을 수 있다.
비가 온다고 편안한 곳에 콕 박혀있는다면 나는 비오는 세상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족쇄를 채우고 만다.

비록 스스로를 '꿈꾸는 여행자'라고 명명하긴 했지만 꿈만 꿔서는 절대로 제대로 된 여행을 즐길 수 없다.
여행은 꿈만 꿔서는 안된다.
스스로 조직하고 결행하면서 뭔가 재밋거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같은 배낭여행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그래 돌아다녀보자.

일단 배낭만 민박집에 던져놓고 비오는 거리를 마음껏 돌아다니기로 했다.
'미자 이모'라는 여자가 베네치아의 수상버스인 바포레토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잰 걸음으로 걸어가는 여자의 뒤를 따라가면서 갑자기 '미자'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슬거머니 웃고 말았다.
어릴 때 우리집 옆에 살던 여자 아이의 이름이 '미자'였다.

아주 짧은 바가지 머리를 한 까무잡잡한 그녀의 얼굴과 유달리 유쾌했던 그녀의 말투가 떠올랐다.
하긴 그 시대엔 한 집 걸러 뒷돌림자가 '~자'인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살고 있었다.
엄마가 '숙자'였으면 딸은 '경자'였고, 제일 막둥이로 태어났다고 해서 '말자'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도 우리반에 있었다.
일본식의 작명법이 그 시대까지 유행하고 있었다.


일본식으로 읽으면 '~꼬'가 되는 '子'라는 한자가 한국어로 읽으면 '자'라고 발음되었다.
미찌꼬, 아끼꼬라고 부르면 어감이 귀엽거나 자연스러운데 반해, '말자'나 '미자'라고 부르면 왠지 촌스럽게 들렸기 때문에
가끔 학교에선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어색한 일본문화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던 시대였다.



 

 

'미자'씨가 건물 위로 뭐라고 고함을 질렀더니 위에서 툭하고 열쇠 꾸러미가 떨어졌다.
'들어오실 때 이렇게 들어오시면 되요'라고 말하며 미자씨가 싱긋 웃어보였다.
베네치아의 건물들이 으례 그렇지만 '미자 이모' 민박집도 꽤 좁고 궁색해보였다.
방마다 가득가득 이층침상이 배치되어 있었고 침상마다 배낭같은 짐들이 한꾸러미씩 놓여있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빛마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방 안은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웠다.
나도 대충 배낭을 던져놓고 바깥으로 나왔다.


제법 익숙한 길이긴 하지만 행여 잘못 길을 들 경우 제대로 찾는데 낭패를 보기 때문에 어슬렁거리면서 주변의 지리부터 익혔다.
다행히 리알토 다리와 아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접근하긴 쉬웠다.
길을 잃어도 리알토 다리나 산 마르코 광장이 새겨진 표지판만 찾으면 되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지만 나는 우산도 없이 오랜만에 찾아온 베네치아를 스케치하기 바빴다.

하긴 우산없이 다니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레인코트의 깃을 빳빳히 세워서 비를 맞으며 걷고 있었다.
마치 비 맞는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처럼 여유있어 보였다.
얼마 남지 않은 이탈리아 여행이지만 나도 여행자로서의 그 여유를 즐기려고 애썼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데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데로 그렇게 흘러가듯 즐기는 그런 여행...
가끔 까페에 들러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훌쩍 마시면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기운이 들끓어 올랐다.


비오는 날에 마시는 에스프레소향의 그윽한 묘미는 또다른 이름의 열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너무 쓴 탓에 입에 한 모금 담기도 힘들지만 막상 마시다보면 그 은근한 맛에 중독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지 않았으면 비오는 날, 몸 속을 꿈틀대는 농도짙은 외로움에 잔뜩 주눅들고 말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