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 피렌체와 피사에서 파란 가을하늘을 보다.



 










산 지미냐노를 떠난 우리는 다시 피렌체로 차를 몰았다.


바람은 여전히 강하게 불었고 햇살은 뜨거울만치 강렬했지만 토스카나 특유의 풍광은 여전했다.
태양의 축복을 톡톡히 받은 토스카나의 오래된 언덕 위에 자리한 빛나는 중세의 성...
햇살 아래 잔뜩 웅크리고 있는 성의 자태를 바라볼 때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고요하게 침잠했다.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사이프러스 나무만이 시간의 흐름을 일깨우고 있었다.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하고 한순간에 집과 재산까지 빼앗긴 그녀(다이안레인)는 친구가 건내준 이탈리아행 티켓을 받아들었다.
삶에 대한 한가닥의 희망마저 놓아버린 채 떠난 짧은 이탈리아 여행에서의 그녀는 왠지 쓸쓸하고 우울했다.
토스카나의 풍광에 반해 무작정 달리는 버스에서 내린 그녀가 '태양을 갈망하는 무엇'이라는 이름의 낡은 빌라를 사들이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아름다운 토스카나의 풍경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그녀의 꿈같은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는 '토스카나 태양 아래서(Under the Tuscan sun)'라는 영화.
보는 내내 나를 설레게 했고 따뜻함이 가슴 가득 번졌으며
토스카나로의 여행을 더욱 재촉하게 만든 그 영화처럼 토스카나 지방은 햇살이 무성했다.
비록 어떤 로맨스나 특이한 에피소드도 내게는 늘 빗겨가고 없었지만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낡고 오래된 것이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만큼 토스카나에는 사람을 끄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피렌체


피렌체는 15세기의 문예부흥 르네상스를 기념하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상징이다.
단테, 페트라르치,마키아벨리와 같은 작가들은 피렌체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을 쌓았으며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도나텔로와 같은 미술가들의 그림과 조각품은 피렌체를 세계 최고의 예술도시로 탄생시켰다.

피라솔레의 구릉지대가 에트로리아 사람들의 오랜 터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59년 로마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피렌체는 비로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6세기 롬바르드족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이어 피렌체는 암흑 시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도시국가로 일어섰다.
13세기에 들어서는 양모와 직물 무역의 급속한 성장과 더불어 강력한 금융업의 후원으로 피렌체는 이탈리아의 주요 세력권에 진입했다.


처음에는 길드(중세의 상인단체)가 장악했던 정치권력을 이어 피렌체 공화국이 차지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권력은 세력을 과시하는 귀족가문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가문은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이었다.
피렌체와 토스카나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지배는 3세기에 걸쳐 지속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통치기간동안 피렌체는 유럽의 문화와 지성을 선도해갔고,
국젝적인 도시 분위기와 부유한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전대미문의 예술적 발전을 이루었다.
피렌체로 몰려드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 덕분에 도시의 거리, 교회, 궁전마다 세계 최고의 르네상스 작품들로 가득했다.

1737년에 들어서 비로소 메디치 가문은 세력을 잃고 피렌체는 1860년 이탈리아가 통일하기까지 오스트리아의 지배로 들어갔다.
피렌체는 그 후 1865-1871년까지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 자리잡았다.
1966년 11월에 발생한 아르노 강의 밤람으로 피렌체의 거리와 예술유산들이 많은 손실을 입었다.

 

 


 

 





















































































 

 

 

 

피사


중세 피사는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서부 지중해에서 오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12세기에 이뤄진 스페인, 북아프리카와의 교역으로 피사는 막대한 상업적 부를 축적하고
과학적, 문화적 혁명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한 피사의 번영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축물에 잘 반영되어 있다.
피사는 1284년 제노바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여 항만이 막히면서 상황은 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결국 피사는 1406년 피렌체에게 무릎을 꿇고,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최대 위기를 겪게 되었다.

 

 


 

 








한적한 토스카나의 국도로만 달리다가 어느새 입성한 피렌체는 대도시 특유의 복잡거림으로 분주했다.
수많은 사람들과 차량들의 물결은 익숙하지 않은 풍경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네비게이션이라는 문명의 총아 때문에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찾아들었고 핸드폰으로 조선족 민박집에 전화를 걸어 방의 유무를 확인했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신조어가 그래서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노트북(요즘은 넷북)을 들고 다니면서 무선인터넷 등을 이용해 여행의 기록을 생생하게 블로그에 올리고,
숙소에서 여유롭게 쉴 때는 미리 저장해놓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소일하고,
가끔 외국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문득 막히는 표현이나 단어가 나오면  전자수첩을 꺼내서 확인시켜주고,
MP3를 들으면서 GPS가 내장된 PDA를 이용해 길을 찾거나 무료할 땐 PDA로 게임을 하기도 하고,
로밍된(또는 자동로밍된) 핸드폰으로 전화나 문자를 날려 가끔 연락을 취하기도 하고,
디지털카메라로 그 거리의 모습을 담는 것이 낯설지 않는 여행법이 되었다.


어느새 여행자들의 배낭엔 다른 어떤 짐보다도 전자장비의 비중이 늘어나게 되었다.
사실, 내 배낭만 해도 그랬다.
3~4개나 되는 렌즈, 디카(dslr), 이미지저장장치, 여분의 밧데리(3~4개), 삼각대, 각종 카메라 액세사리에다가 어댑터,
즉석프린터(MP-300), 즉석프린터용 필름 100통, MP3, MP3용 소형 스피커, GPS, UMPC(마우스와 키보드), 소형녹음기, 핸드폰 등
하나하나 열거하기에도 벅찬 작은 전자장비들이 내 배낭을 가득 채웠다.
각종 기기를 충전하기 위한 어댑터와 밧데리의 무게만도 만만찮아서 이렇게까지 여행을 다녀야 하는지 스스로 자책해본 적도 많다.


무게는, 곧 여행의 기분을 절망으로 치닫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무슨 대단한 여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 여행은 늘 무거웠다.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것이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행의 목적이 아무래도 '사진'인만큼 카메라는 절대적이다.
좋은 화질과 만족스러운 앵글을 담기 위해서는 다양한 화각의 렌즈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광각부터 표준, 망원까지 챙겨간다.
인물사진도 좋아하기 때문에 50.4나 85.2같은 단렌즈까지 집어넣다 보면 금새 렌즈만 해도 4개이상이 되어 버린다.
이쯤되면 무게에 대해서는 초월해지기 마련이고 고행조차도 달콤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두운 시간대의 풍경(일출, 일몰, 흐린 날)이나 야경을 찍을 때 반드시 필요한 삼각대도 들고 간다.
아무리 작고 가벼운 삼각대라고 하지만 이동시엔 꽤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하다. 한 마디로 계륵같은 존재~


짧은 여행이라고 할 지라도 수많은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이미지 저장장치도(O.T.G)도 반드시 필요하다.
또 현지인들과 소통할 목적으로 구매한 즉석프린터(MP-300)와 필름(언제나 100통이상)도 안넣을 수 없다.
거기다 여행을 기록하고 간단하게 사진을 보정할 목적으로 구매한 UMPC까지 넣으면
따라오는 블루투스 마우스와 키보드까지 하면 벌써 한 짐이다.


MP3, 핸드폰, 소형녹음기, GPS 등은 작기 때문에 호주머니나 가방 쪽에 걸어서 이용하면 된다고는 하지만,
충전 때문에 부속적으로 따라오는 어댑터만 해도 또 한 가득...
그렇게 디지털 노마드 전사로서의 무장을 끝내고 나면 허리가 휘청거릴 정도다.
카메라와 렌즈 하나만으로 여행을 다니던 때와 비교하면 감히 상상도 못할만큼 엄청난 양에다가 무게였다.
여리고 약한 내 몸이 감당해야 할 여행의 무게이기도 했다.


이제는 하나라도 빠뜨리고 여행을 떠나면 오히려 초조해 지거나 불안해지니 이미 장비의 효과에 대해 단단히 중독되어 버린 셈이다.
고칠래야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사진과 기록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비롯된 불치의 병,
그렇게 혹독한 디지털 노마드의 길로 접어들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바람은 여전히 강했지만 따뜻하게 내려쬐는 햇살은 소름끼치도록 찬란하게 피렌체를 비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써니데이sunny day'였다.
조선족 민박집에서 충분한 잠으로 전날 쌓인 피로도 말끔히 푼데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밥까지 먹을 수 있어서 기운은 분기탱천했다.


아름다운 햇살의 영접을 받으며 다시 출발이었다.
사람의 기분은 날씨라는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3일째 접어드는 토스카나 여행에서의 날씨도 영락없이 맑고 쾌청했다.
맑고 쾌청한만큼 시계까지 좋았고 구름형태마저 마음에 들어서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은 한결같이 그림이 되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사진이 의도한대로 나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날도 있기 마련인데 희안하리만치 기대 이상의 사진이 나오고 있었다.
아침녘이라 빛의 양이나 질감, 색이 좋은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쾌청한 가을하늘이 풍경을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이런 날은 기분마저 따라서 상승되어서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오우~ 원더풀 써니데이 oh~ wonderful sunny day'

함께 한 동행들도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우리의 즐거운 여행을 자축하고 있었다.
행운이고 축복이었으며 즐거운 추억거리를 가슴 가득 실고 떠나는 여행이기도 했다.
느끼고 싶지 않아도 눈만 돌리면 코발트빛의 가을하늘이 머리맡에 나타났고

유영하듯 하늘 속을 둥둥 떠나니는 솜사탕같은 구름들이 절정의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하늘에 취해 피사로 가는 길을 잘못 찾아 한때 국도변을 헤매기도 했지만 그러면 어떤가.
딱히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바람처럼 떠도는 진정한 노마드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만으로도 또다른 행운이긴 마찬가지였다.
원없이 햇살에 취하고 파란하늘을 마음껏 우르러 본 그런 날이었다.

우회한 탓에 시간을 많이 소비하기는 했지만 무사히 피사의 사탑이 있는 깜포 데이 미라꼴리에 안착할 수 있었다.
피사나 피렌체 같은 이름난 관광지는 예전에도 와봤기 때문에 감흥은 떨어졌지만
처음 이곳을 찾는 일행들에겐 묘한 호기심이 일었나 보다.


사진으로만 봐왔던 유명한 곳을 직접 와서 육안으로 확인하는만큼 감동스러운 일도 없으리라.
게다가 하늘은 너무 파래서 눈물이 날 지경인데다 두오모와 세례당,
그리고 사탑의 회백색 등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기울어진 사탑을 떠받치는 포즈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픽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우스워보였다.


아내와 함께 찾았던 몇 년 전의 피사의 깜포 데이 미라꼴리(기적의 들판이란 뜻)도 꼭 이랬다.
파란색감이 뚝뚝 묻어날 것 같은 하늘과 눈부신 두오모와 세례당의 선명한 회백색 벽들 때문에 숨이 턱하니 막혔다.
비록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느닷없이 달라붙은 집시들의 습격으로 한때 곤욕을 치루기도 했지만,
꽤 많이 기운 피사의 사탑과 아름다운 하늘 때문에 이내 상쇄되고 말았다.


그렇게 피사로의 발걸음은 '아내와의 여행'을 추억하게 만드는 작용을 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나의 좋은 길동무이기 때문이다.
문득 죄책감처럼 아내가 그리워졌다.

파란하늘 아래에서 그리워했던 궁상맞은 그녀에 대한 단상~!
비둘기들이 축복처럼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