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옛수도에서 기황후를 추억하다





 게르를 할퀴는 날카로운 바람소리에 눈이 번뜩 뜨졌다.
자기 전에 넣어놓은 장작이 다 타버려 난로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건조하고 냉냉한 한기만이 게르 안을 떠돌아 다녔다.
어둠 속에 웅크려 앉아 신문지에 불을 붙이고 마른 장작을 집어 넣어 불씨를 되살리려는데, 의외로 불이 붙지 않고 연기만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한참을 달그락거렸더니 그 소리 때문인지, 한기 때문인지 또는 연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생님들도 하나둘 일어나셨다. 온기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게르에서 맞이한 몽골의 첫새벽은 정말 추웠다. 잠시 화장실이라도 다녀올까 싶어 밖으로 나왔는데, 성그런 추위가 금새 온몸들 휘감았다.


부실한 하체가 먼저 후들거렸고 나도 모르게 이빨이 다다닥거리며 떨려왔다.
추위에 적응하지 못할 계절에 떠나와서 그런지 체감으로 느껴지는 추위는 예상외로 심각했다.
그 와중에도  올려다 본 새벽하늘은 어찌나 예쁘던지, 한동안 숨을 죽인 채 서 있어야 했다.
붉은 기운의 여명이 조금씩 번지기 시작하는 동쪽 하늘, 여전히 어두운 새벽하늘을 가르며 흐르듯이 반짝이는 은하수와 카시오페아, 오리온, 북두칠성 등의 낯익은 별자리들, 가끔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추락하는 유성들까지 여과없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기분좋은 느낌이라니...

게르 안으로 들어와보니 불 담당이신 조선생님이 다시 불씨를 살려놓으신 모양이었다.
냉냉하던 게르 안은 어느새 데워졌는지 훈기로 가득했다.
배낭에서 주섬주섬 옷을 꺼내 입었다.
혹시나 싶어 가져온 등산용 내복부터 폴라잠바, 고어텍스 잠바까지 겹겹이 껴입으니 어느새 몸이 육중해졌다.
삼각대와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밖으로 나섰다.


닫힌 빗장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황량한 초원이 그대로 펼쳐졌다.
잠시동안의  망설임과 두려움이 귓전을 술렁대며 스쳐갔다.
허허롭기만 한 초원의 어디에도 갈만한 곳은 없어 보였다.
건조한 벌판은 앙칼진 바람이 연신 만들어내는 상흔에 이미 얼룩져 있었다.
여명이 트는 동쪽을 향해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귓전을 스치는 거친 바람소리에 이내 묻혀버렸다.
돌아보니, 숙소가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린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차가운 바람의 작은 결들이 손가락 틈새를 간지럽히듯 빠져나갔다.
이런 바람을 맞아본 게 얼마만이던가.
언젠가부터 나는 바람을 아니 희망을 잊고 살았다.
빡빡한 삶에 부대껴 바람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비로소 혼자라는 게 실감이 난 지금에야 그렇게 갈망하던 자유가 비로소 내 주위에 만연함을 느꼈다.


차가운 바람도 결코 낯설지 않았다.
바람은 내 존재의 또 다른 표현처럼 느껴졌다.
비록 날씨는 추웠지만, 명치 끝에서 뿜어져나오는 어떤 희열로 인해 충만하고 따뜻한 기운이 온 몸으로 퍼졌다.
살아있음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살아 있음을 누군가에게 감사드리고 싶었다. 종교적 만족감이 꼭 이렇지 않을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동쪽하늘도 내 마음처럼 시나브로 붉어지고 있었다.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좋은 실적을 내야 하는 업무적인 삶은 때론 버티기 힘들 정도로 힘겨웠다.
매일 매일이 피말리는 삶의 연속선상에 서 있는 셈이었다. 어느새 계산기를 튕기며 철저히 실리만 추구하는 경제형 인간으로 전락해 갔다. 단언하건대, 태생적으로 숫자에 약할 뿐 아니라 목표에 대해서도 치밀하지 못한 낭만적 천성을 타고 난 모양이었다.
그러다보니 삶은 차츰 피폐해져 갔고 글을 쓸 여력마저 잃어버렸다. 남아있는 감성과 열정은 아예 메말라 비틀어진 채 냉소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못난 습성이 생겼다. 매일 입력되는 숫자들은 커다란  혹처럼 머리 한 켠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혹은 스트레스라는 다분히 실체적인 형태로 표출되는가 하면 의도되지 않은 우울증의 형태로 분출되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의도와는 다르게 나는 엇박자처럼 세상을 살아갔고 세상은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내게... 몽골의 바람은 그대로 해방구였으며 새로운 삶을 향한 돌파구였기도 했다.








초원의 저 너머로, 게르 한 채가 보였다.
배기구로 연기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그 게르 앞에 삼각대를 펼치고, 일출을 기다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밋밋한 하늘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몽골의 일출을 담아내려면 게르 앞이 제격일 성 싶었다.
하늘은 점점 더 붉은색을 토해내고 있었다.
구름만 제법 깔려 있었어도 더 없이 멋진 일출이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 부분이 가장 아쉬웠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지만, 나는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서 기분좋게 바람을  맞았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렸다.
게르에서 누군가 나오는 게 보였다. 실루엣으로 보아 여자인 듯 했다.
두툼한 이불같은 것을 두르고 나온 여자는 게르의 위쪽의 환풍구를 열더니 흙바람 날리는 차가운 땅에 앉아 한참동안 동쪽하늘을 바라보았다. 염원이라도 드리는 것일까. 여자의 행동이 얼마나 숭고하게 여겨졌는지 짧은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여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내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개념치 않고 다시 게르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몽골의 여명은 생각보다 더뎠다. 이제야 뜨겠지, 뜨겠지 했는데 벌써 1시간이 훌적 지나 버렸다.
그동안 부지런히 초원의 저 끝에서 불어오는 찬바람만 고스란히 맞은 셈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춥게 느끼지 않은 건 어떤 몰입 때문이었다. 우울하지 않은 기분 좋은 몰입이었다.
세찬 바람이 귓전을 타고 흐를 때면 비로소 살아있음이 실감이 났고 그때마다 내 심장의 거대한 맥박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그보다 좋은 몰입이 어디 있을까 싶다.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초원 너머에 있는 야트마한 산 위로 붉은 빛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게르 안으로 들어갔던 여자가 다시 나왔다.  게르 앞에 다시 자리를 틀고 앉더니 하염없이 일출을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일출은 밋밋했다. 막 떠오를 때의 색감은 화려했지만 받춰주는 구름이 없다보니 그 이상의 화려함은 연출해내지 못하고 자지러져 버렸다. 비록 화려한 일출이 아니면 어떤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함께 일출을 보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은데다 새로운 희망까지 생겼으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가슴은 태양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그건 삶의 의욕이었다.


아침이 되자 초원의 풍경은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바람은 여전했지만 그 안의 차가움은 많이 무뎌져 있었다.
골고루 뿌려진 빛살들이  초원의 냉냉한 한기를 따뜻하게 핥아주었다. 밥을 먹고 다시 출발을 서둘렀다.
구름 한 점 없는 아침 하늘은 물감을 뿌린 듯이 파래서 눈이 시릴 정도였다. 




















오전의 첫 방문지는 하르호른의 에르덴 조 사원이었다.
하르호른 또는 카라코름이라고 부르는 이 곳은 몽골제국의 첫 수도였다.
역사를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특히 몽골의 역사를 읽다보면 한국의 역사와 마주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아무래도 고려가 몽골의 간접지배를 받아서 그랬겠지만, 지명 하나에도...어휘 하나에도 연계성이 있음에 스스로도 놀라게 된다.
잠시 한국과 연관된 역사를 들춰보고 넘어가고자 한다.


원래 정착 개념이 없었던 몽골인들은 막강하고 잔인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징기스칸을 이은 오고타이칸은 넓어지는 대제국을 경영할 수도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오르콘강이 흐르는 하르호른을 수도로 삼았다.

'하르'는 몽골어로 '검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검은 자갈'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몽골인들은 '저주'의 뜻이 담긴 검은색을 경원시했다.
몽골인들이 선호하는 색은 한국과 똑같이 흰색... 그래서 새해의 첫날을 '차강 사르'(하얀 달)이라고 했고, 우리 여정에 포함된 화이트 레이크도 몽골어로 '차강 도르'라고 하여 신성시 한다. 만주에서 카스피해까지 열린 초원길의 중심엔 바로 제국의 수도 하르호른이 있었고, 이 길은 20만마리의 말들이 배치된 역참에 의해 원활하게 운영되었다.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라는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수많은 동서양의 대상들과 식민지의 사신들, 각 종파의 선교사들이 각자의 목적을 위해 하르호른으로 몰려들었고, 조그만한 초원의 작은 도시는 점차 번성을 누리기 시작했다. 파키스탄과 중국을 잇는 가로를 지금도  '카라코름 하이웨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실크로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 도로는 위구르-돌궐이 처음 개척하여 몽골에 의해 계승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징기스칸이 죽은 뒤, 몽골 내부는 수많은 권력다툼이 전개되었고 정통성을 인정받은 쿠빌라이칸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그의 치세동안 원나라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대원大元으로 국호를 바꾸고 수도를 지금의 북경北京 인근인 대도大都로 옮기면서 하르호른의 짧은 시대는 끝이 났다.
'저주'의 뜻이 담겨서 그랬을까. 왕궁의 흔적은 오늘날 찾아보기조차 힘들다.  하르호른의 짧은 영화를 이어받은 대도는 이후 원나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이 되어 다양한 문화가 교류하는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마르코폴로가 찾아왔고, 로마황제의 사신이 영접하였으며, 식민지의 수많은 왕과 사신들이 배알하기 위해 방문했다.


항복사절로 갔던 고려의 태자 왕전(훗날 원종)이 여름수도인 상도에서 쿠빌라이칸을 만나게 되었다.
반갑게 고려태자(원종)를 맞이한 노구의 쿠빌라이칸은 '고려는 만리밖에 있는 먼 나라다. 옛날 당태종이 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복하지 못했는데, 지금 그 태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을 남겼다.
중국사서에서는 고구려를 줄여서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900년의 긴 역사를 접어야  했지만 쿠빌라이칸과 그의 신하들은 여전히 고려를 예전의 강성했던 고구려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그런 고려가 몽골의 영향력 아래 들어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을까. 그만큼 고구려의 영향력이 강성했음을 역설적으로  대변해주는 셈이 된다. 


명나라의 주원장에 의해 고비사막으로 쫓겨난 몽골인들은 하르호른을 수도로 삼고 '북원北元'이라는 나라를 건설했다.
북원의 초대황제는 소종昭宗으로 그는 고려출신의 기황후와 원나라 마지막 왕 순제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였다. 
한국역사에서 기황후는 철저한 유교사관에 입각해 왜곡되고 날조된 감이 없지 않다.
고려말, 기씨 일족의 득세와 그들이 일삼던 전횡 때문에 반원정책을 펼쳤던 공민왕과 그 뒤를 이은 친명 사대주의자들에 의해 기록된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일 것이다.


공녀 출신의 그녀는 온갖 역경과 차별을 겪으면서 마침내 중원의 안방을 차지한다.
황후가 되자, 그녀는 고려에서 착출하던 공녀와 환관제도를 폐지했고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성省으로 만들자는 원나라 조정의 정책을 무마시켰다.  무능한 순제를 대신하여 꺼져가던 원나라를 살리고자 군권을 잡고 흉흉한 민심을 살리기 위해 형평과세 정책을 펼쳤으며, 조정의 구조개혁 등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순제의 양위를 이끌어내지 못한 그녀는 끝내 원나라 패망을 지켜봐야 했다. 


1388년 고비사막까지 침입한 명나라 군대에 의해 하르호른은 초토화 되었고, 7만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등 수모를 겪었다.
명맥을 이어가던 몽골의 잔여세력들은 내부다툼으로 인해 급격하게 쇠약해져 갔다.
급기야 17세기에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정복당했고 몽골은 중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20년 외몽골이 독립할 때까지 중국인들의 강압적인 정책 아래 몽골인들은 굴욕적이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외몽골은 독립을 했지만 내몽골은 '자치구'라는 형태로 여전히 중국의 식민지로 남아있고 브리야트인들은 러시아의 한 공화국으로 편입되어 버렸다. 

한때 중국과 러시아를 휩쓸던 그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들에 의해 분열된 채 남아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촛불처럼 활활 타올랐다가 이내 굴욕적인 역사를 살아야 했던 몽골인들의 역사가 못내 아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에르덴 조 사원은 폐허가 된 왕궁지 위에 조성된 몽골 최초의 티벳불교사원이다.
사방 400미터에 달하는 절터 주변으로 108개의 스투파(탑)가 달려있는 성곽이 둘러싸고 있다.
탁 트인 초원과 파란 하늘 아래에 보석처럼 빛나는 108개의 스투파는 오히려 성스럽기까지 했다.
이름난 관광지라 그런지, 서양인들의 모습이 꽤 눈에 띄였다.
하지만, 막상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은 폐허처럼 쓸쓸하고 황량했다. 세계제국의 첫 수도였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붉은색 법의를 입은 동자승들이 장난을 치며 우리곁을 지나쳤다.
바람이 불었다. 마른 풀들이 자지러지듯 흔들렸다. 그저 세월만 무상했다.


티벳불교의 색감은 눈이 휘둥거려질만큼 화려하고 정교했다.
비록 세월의 앙금이 묻어 바래긴 했어도, 그 독특한 색감이 주는 묘한 매력에 이끌렸다.
몽골이나 티벳같이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이런 색을 만들어 냈을까 싶을 정도로 감탄스러웠다.
일행들과 헤어져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유적지를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방문한 만큼은 꼼꼼하게 살펴보는 편이다.
그들의 오랜 역사와 정신이 그 속에서 들어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석상의 형태에서도, 걸어놓은 하닥에서도, 옛 몽골문자로 부조해놓은 비석에서도 이방인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들 고유의 뭔가가 반드시 깃들어져 있을 것이다. 외면하지 않은 채 그것들을 눈으로 담았다.


입구에 '마니차'가 놓여있는 한 사원 안으로 들어섰다.
동자승들이 마당 앞에서 오전의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갖다대자 'No Photo'라고 말은 하지만 싫은 기색은 없었다.  
한국의 사찰처럼 엄숙하거나 경건하진 않다. 하얀 사원의 외벽에 부셔지는 햇살만큼 동자승들의 표정은 밝고 때론 익살스러웠다.

푸르공은 다시 우리의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하늘은 어느새 개운하게 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