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카프리의 에메랄드빛 바다





















여행...

나는 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고 사진을 찍지 못해 안달이 난걸까.
자신에게 던져진 우문은 결국 우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내 장비는 하나씩 더 늘어났고 나는 기꺼이 그 무게의 고통 쯤은 감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카메라와 렌즈3개(때론 4개), 가벼운 삼각대 하나와 스트로보, 즉석 프린터와 필름 30장...
작은 GPS와 이미지 저장장치, 각종 배터리와 가방의 파우치들...
여린 내 어깨가 짊어져야 할 여행의 무게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여행을 즐기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진만 찍기 위한 사람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여행이 주는 오롯한 즐거움은 버린 채 그저 사진에만 탐닉하는 멋없는 사람쯤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카메라가 있어서 내 여행은 충분히 즐겁다.

카메라는 내게 주어진 또다른 시선이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일반적인 시각조차도 카메라 앵글로 판단하며 그에 적절한 렌즈군을 고르는 게 버릇이 되어 버렸다.
파인더로 보는 세상는 분명 경이롭고 독특하며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광각렌즈의 광활함과 왜곡이 주는 묘한 신비로움과
남들이 볼 수 없는 독특한 시계를 열어주는 망원렌즈의 압축성은 분명 풍경사진에 탐닉하게끔 하는 탁월한 효과가 있다.

렌즈의 다양성은 구도와 앵글의 다양성을 연출해 내는데 뛰어나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여행 때마다 많은 렌즈를 가져가는데 주저하지 않는 지 모른다.

낯설고 독특한 여행 지역의 멋진 풍광을 내가 원하는데로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이 횟수를 거듭할 수록 끊임없이 자극했을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 나는 특별히 정형화된 규칙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때문에 어수룩한 아마츄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테지만 그래도 정형화되지 않아 오히려 자유롭다.

단지 마음이 움직이는데로 눈끝이 닿는데로 미친듯이 사진을 찍는다.
그건 지독한 탐닉의 또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아름다운 풍광(또는 풍경)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현지인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비록 서툴기는 하여도 그들과 소통하길 원한다.
낯선 이방인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현지인들과 쉽게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것도 분명 카메라라는 매개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어서 액정으로 그것을 확인시켜주고 직접 인화를 해줄 때의 그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게 된다면,
누구라도 이 기이한 체험이 주는 즐거움에 중독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래저래  여행은 그래서 즐겁다.
어떤 걸 꼭 봐야하고, 어딜 꼭 가야한다는 사명감같은 건 접은 지 이미 오래됐다.

그때그때 마음이 동하기 시작하면 그 느낌을 따라서 움직이는 게 내 여행의 형태고 묘미라고 생각한다.
찍을 거리가 풍부한 곳은 그곳이 설령 지옥이라 할 지라도 숨어있는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치명적인 유혹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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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지만 내 여행은 누구보다도 일찍 시작된다.


알람이 울리지도 누가 깨우지도 않았는데 이른 새벽이면 혼자 깨어난다.
불꺼진 복도를 가로질러 조용하고 기분좋게 아침샤워를 끝내고 방에서 간단하게 짐을 꾸리고 있으니 부엌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만큼 일찍 일어난 민박집 주인 부부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나폴리의 '소나무 민박'은 중국교포(조선족) 부부가 운영하는데 가르발디역에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접근성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어느 역 앞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가르발디 광장이란 곳도 어수선하며 지저분하고
유색인종(흑인, 아랍계통, 중국계)들이 유난히 많아서 잔뜩 움츠리게 하지만 특별히 조심만 한다면 그다지 위험한 곳은 아니다.


카메라 가방을 짊어지고 바깥으로 나서려 하자 주인 부부가 나를 부른다.
새벽부터 부산하더니 그 사이에 작은 도시락을 싼 모양이다.


은박으로 싼 도시락과 간이 플라스틱 스푼, 사과 하나가 든 작은 봉지를 살짝 내밀며 하얗게 웃는다.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다.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함을 표한다. 정성이 들어간 따뜻한 도시락을 건내받으니 긴장됐던 마음이 스르르 녹는다.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한 오늘의 목적지는 휴양지로 잘 알려진 '카프리'섬이다.
카프리는 예전에도 한 번 가본 적이 있지만 그땐 겨울이라서 푸른동굴로 운행하는 배편이 끊긴 탓에  보지 못했고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카프리의 정상인 '몬테 솔라로'도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오르지 못했다.
그저 마리나그란데 항구와 아나카프리 등의 언덕 마을만 둘러보고 온 게 전부여서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던 터였다.
쾌속정으로 50분 거리에 있다지만 아침 첫 배를 타려면 아무래도 서두르는 게 좋다고 한다.
유명한 관광지인만큼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갈 게 분명했다.









 


































물어 물어서 트램을 탄다.
문득 예전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서 매고 있던 카메라를 꽉 움켜쥐고 트램의 가장자리에 선다. 새벽이라 그런지 트램 안은 제법 여유롭다.

몇 년전, 이 트램 안의 풍경이 문득 떠올랐다.
'예전의 이 트램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지'


승차한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뒷주머니에서 몇 개의 손들이 오가는 게 느껴졌다.
내 옆에 바짝 달라붙은 목발을 한 사내와 대머리 남자의 손임을 직감할 수 있어서
사내들의 손을 털어내며 호통을 치자 목발 사내는 목발을 보이면서 무관하다는 재스추어를 취했다.

스멀스멀 웃는 그들의 눈빛이 어찌나 가증스러운 지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뒷주머니는 지퍼로 되어 있어서 조금만 신경을 기울이면 그 기분나쁜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고
결정적으로는 아무것도 넣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도난당할 염려는 없었다.


함께 탄 아내와 여대생도 고함을 지르며 뒤척였는데 그녀들도 불쾌한 경험을 당하긴 마찬가지였다.
트램을 타기 전에 배낭을 가슴 쪽으로 돌려맸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별문제는 없겠지만
그 소름끼치는 손길만큼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꺼칙했다.

빙 둘러선 소매치기 일당들이 우리를 포위한 모양이었다.
아내와 여대생을 창가로 이동시켜서는 한 쪽면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외곽쪽에서 시나브로 기어들어오는 손들을 내가 막아내는 형국이 되었다.
소매치기라고 잠정적으로 단정한 몇 명의 사내들과 눈이 마주치자 예의 그 가증스런 미소를 보냈다.
한국 같았으면 귓싸대리기로 한 방 갈겼을 텐데 여긴 험악하기로 소문난 나폴리...
그리고 꽤 많은 패거리들의 위세에 기가 눌린 탓에 감히 그러지도 못했다.


하는 행태를 봐서는 전문털이꾼은 아닌 듯 했다. 얼마나 솜씨가 어설펐으면 당하는 사람들이 다 알아챌 정도였을까 말이다.
공간이 어느 정도 확보되자 지레 소매치기를 포기한 그들은 안면을 바꿔 친밀감을 유도했다.
어설픈 영어로 '어디서 왔어?'를 물었고 '꼬레'라고 대답하자 목발사내가 '꼬레'라고 복창을 하면 금새 버스 안은 '꼬레'의 물결로 웅성거렸다.


그러면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물어오는데, '북한사람들을 본 적이 있느냐'며 빈정거리듯 반문하면 그저 웃기만 했다.
'Sud Corea'라고 하자 또 일당들은 복창을 하듯 서로의 얼굴을 멋적게 바라보고 버릇처럼 복창을 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도 그들의 장난끼 섞인 표정들을 보니 풋하며 웃음이 새어나왔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낙천적인 나폴리 사람들, 아니 나폴리 소매치기들...
한 통속이란 게 금새 들통난 셈이지만 더 이상의 해꼬지는 없었다.
태생적으로 유쾌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금새 트램 안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평온을 되찾았다.
악몽과 같은 10여분 동안 트램에서의 불쾌하고 어색한 추억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수많은 손들이 수시로 호주머니를 넘나들며 더듬거리던 그 겨울의 악몽같은 추억은 다행히 재현되지 않는다.
예전과는 사뭇 다른 트램안의 분위기에 다소 마음을 놓으면서도 사주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지독한 길치인 까닭에 낯설 길을 나설 때면 수시로 현지인들에게 묻는 버릇이 생겼다.
'차오'라고 인사한 뒤, 가지고 있는 지도를 불쑥 내밀어서 지명을 가리키면
이태리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자신들의 언어로 뭔가를 부지런히 설명을 한다.
못 알아듣는 눈빛을 보내면 그들은 손을 뻗어 그곳을 가르키거나 직접 데려다 주는 친절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소름처럼 잔뜩 돋은 긴장이 잦아들자 거짓말처럼 피로가 밀려온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이런 자유와 한가로움이 못내 어색하지만 아나카프리의 언덕마을을 꽤나 쏘다닌 탓에 벌써 지쳐 가고 있다.
푸른동굴의 에메랄드 빛 색감에 감탄했고 뱃사공이 불러주는 '오 솔로미오'에 또 한 번 감격한 탓에 여운이 꽤나 오래갈 법도 한데,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아나카프리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치인데다 때아니게 달궈진 초가을의 무더위 앞에서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니던 나는 그만 진이 빠져 녹초가 되고 만다.


기운을 돋구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먹긴 하지만 로마에서 먹었던 그 맛을 기대하며 먹었는데 의외로 별로다.


발 아래에 아나카프리가 낮게 드러누워 있다.
전망 좋은 몬테 솔라로 정상에서 오랫동안 풍광을 조망한 채 앉아서 시간을 죽인다.
늦은 점심을 비싼 맥주와 샌드위치로 떼우고 자연이 선물하는 지중해의 낯선 바람과 햇살 속에 그대로 녹아든다.
가을볕이 제법 따가운데도 서양인들은 한결같이 그 볕 속에서 일광욕을 하듯 오래 머문다.
어느새 말랑말랑해진 감성으로 오랜만에 카메라마저 놓은 채 오랜만의 자유와 평화를 탐닉한다.


아이팟과 연결된 작은 스피커에선 유키 구라모토의 '로망스' 선율이 은밀하게 세어나오고
한참동안 사진을 찍으며 떠들어 대던 중국인 단체여행객들이 돌아가자 그야말로 몬테 솔라로는 화사한 스냅사진처럼 정적이 뚝 끊긴다.
고운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목젓을 타고 흐르는 맥주 삼키는 소리만 없으면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휴양이야...'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댄다.
휴양이면 어떻고, 여행이면 또 어떤가.
여행을 지나치게 자위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육체적 고통이 조금이라도 동반하지 않는 여행은
휴양 쯤으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고약하고 남루한 생각들이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는 모양이다.


말간 햇살이 카프리섬 위에서 빛나고 있고 비록 약한 헤이즈가 끼긴 했지만 쾌청하게 푸른 하늘과 에메랄드 바다가 바로 곁에 있지 않은가.
아나카프리의 나트마한 언덕마다 빼곡히 자리잡은 회백색의 집들은 눈부셨고,
여행자들은 한결같이 '원더풀'을 외치며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한 순간들을 제대로 즐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적당히 배도 부르고 마신 맥주때문에 긴장마저 해소되었으니 순간을 즐길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국처럼 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도 없는데다 징징거리는 핸드폰마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단지 여행자일 뿐이고, 주어진 순간의 여유와 자유를 만끽할 특권과 자격을 갖췄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으니 수그러들었던 몸은 편안해지지만,
그렇더라도...


왠지 혼자라는 사실만큼은 자신을 못내 초라하고 궁상스럽게 만든다.
햇살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이런 날엔 더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