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 감천동의 태극마을




햇살을 받은 나팔꽃이 그늘진 태극마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은 사람의 집들...
그 고즈넉한 햇살엔 따뜻함이 가득 배여있습니다.





저 낯익은 골목을 오르면...
동무들과 왁짜지껄 모여서 '다시꼬이'라는 놀이를 했던 제법 큰 골목이 나올 것 같습니다.
골목여행은 어쩌면 추억을 찾아떠나는 시간여행과도 같습니다.




너무 파란 하늘 아래 성그렇게 놓여진 집들.
한때는 저런 집들도 부러웠던 적이 있습니다.
판자촌을 뒤엎고 다시 재생한 시멘트집들이지만 지금은 세월의 흔적을 이기지 못하고 후줄그레한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비껴갈 수 없는 날카로운 흔적인가 봅니다. 





그늘진 골목 저 너머에서 한 아이가 고개를 빼곡히 내밀고 우리를 내려다 봅니다.
시간은 달라졌다지만, 호기심 많은 아이의 눈빛은 여전히 우리의 모습입니다.




매운 '청송고추' 한 포대를 받아들고 한껏 기분좋게 정담을 나누고 계시는 할매들.
예전의 빠마머리 아지매들은 어느새 70이 훌쩍 늙은 할매들이 되셨습니다.




좋은 곳에서 마른 고추를 다시 말리는 할매의 손길과 태극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왠지 그리움으로 말문이 콱 막히고 맙니다.




할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팔십서이지.
밀양에 사시는 제 외할매도 연세가 여든일곱이신데, 문득 외할매 생각이 납니다.
조상들은 죽었을 때보다 살아계실 때 더 잘 해드려야 해.
 
고추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고 계시는 할머니는 마치 읖조리듯 그렇게 말씀합십니다.
순간, 뒷덜미가 뜨끔거립니다.




그 할매들이 겪었을 삶의 깊이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가난을, 전쟁을, 그리고 삶을 제대로 겪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세대라서 더욱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매의 머리맡엔 여전히 강렬한 햇살의 춤사위가 흐드러지듯 피어있습니다.
오랫동안 건강하세요.




태극마을 입구에 세워진 낯선 조형물.
젊은 예술가들이 마을의 모습을 변모시키기 위해 세운 조형물에도 영원한 테마인 '사랑'은 빼놓지 않고 씌여있었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태극마을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태극마을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꼽으라면 단연 이 집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얼마전 다녀온 캐나다 퀘벡시티에 가면 쁘띠 샹플랭이라는 예쁜 거리가 있습니다.
그 거리의 끝에는 위의 사진처럼 건물 한 면을 멋진 프레스코화로 그려놓은 건물이 나타나는데,
꽤나 인상적이기 때문에 그 거리의 랜드마크로 불려질 정도입니다.
 
마치 캐나다 퀘벡시티의 쁘띠 샹플랭 거리를 연상시키는 벽화와 너무나 태극마을스러운 집의 작은 화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제 눈에는 쁘띠 샹플랭 거리의 그 벽화보다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퀘벡시티의 쁘띠 샹플랭거리가 지극히 관광객 위주의 인위적인 거리이기 때문에 사실  흥미로움은 반감되었습니다.
하지만 벽화가 걸려있는 태극마을은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더욱 애닳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사람의 흔적을 담고 싶었습니다.
빨간 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내려오면 꽤 그림이 될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그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기대했던 빨간 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아니었지만(요즘 TV나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봅니다).
그곳에 사는 아지매의 모습을 담는 것으로도 사람의 자취를 느끼기엔 충분했습니다.





사람도, 마을도 그렇게 세월의 흔적 속에서 낡고 남루해갔지만...
이곳에 서면 여전히 짙은 향수병에 빠지는 이유는, 나의 원류가 속해있기 때문일 겁니다.
 


날이 너무 좋았습니다.

한바탕 요란한 빗줄기가 스쳐 지나간 다음 날, 부산 하늘은 파랗게 변해 있었고 마치 꿈같은 뭉게구름이 하늘을 유영하고 있었습니다.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주체할 수 없어서 정인님과 손따다닥님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골목출사를 제의했고, 의기투합한 세 사람은 부산 감천동의 태극마을을 찾았습니다.

 
부산 감천동의 태극마을은 사진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은 제게 아주 익숙한 땅이었습니다.
이제는 다들 떠났지만, 한때는 꽤 많은 친구 녀석들이 살고 있어서 자주 들락거리며 노닥거렸던 추억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영도 영선동의 낮은 골목처럼, 이곳 역시 쉼없이 질주하는 시간 속에서도 용케 예전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건물의 색채는 예전보다 훨씬 화려해졌고 전에 없이 마을입구엔 알룩달룩한 조형물이나 벽화들로 인해 흥미를 느낀 사진사들의 시선을 앗아가기는 했어도 20년전의 그때처럼 작고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낯익은 골목들은 마치 시간여행을 하듯 새로운 기분을 선사했습니다. 오르막이 있는 달동네에서 더이상 살기 싫다며 가난한 부모님께 늘상 투정부렸던 어린 날의 철없는 생떼가 떠올라 얼굴이 화들짝 달아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떠올릴 때마다 부산의 '산토리니'라는 허울좋은 말로 치켜세우곤 합니다.
외관이 마치 산토리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칭이긴 하지만, 짐짓 겉만 보고 속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자기 주관적 해석에 불과할 뿐입니다. 새로 칠해진 페인트 속에는 예전의 빛바래고 가슴 아픈 가난의 흔적들이 가득할텐데도, 그저 낯설고 독특한 이미지에 홀린 사람들이 겁없이 지어낸 별명쯤으로 생각하고싶습니다.
 
왠지 이곳은 흥건한 삶의 편린들이 집집마다 한웅큼씩 쌓여있는 느낌입니다.
악다구니를 써가며 온갖 욕설을 퍼붓는 동네 아낙들의 싸움소리가 작은 골목에 가득합니다. 이웃사촌끼리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말이 와전되어 오해가 생겼고 그게 제법 큰싸움으로 번졌나 봅니다. 불구경만큼이나 재미있는 게 싸움구경이라고 잠시 카메라를 놓고 그걸 지켜보고 있자니, 싸움을 하던 한 아줌마가 우리들에게로 달려와 하소연을 합니다. 주위에서 싸움을 말리던 다른 아줌마들은, 이런 사진만큼은 찍지 말라며 우리를 말리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쌍욕에 너털웃음만 짓고 맙니다. 사람 사는 게 어딜 가나 다 그런 모습일텐도, 자신들의 치부가 외부인에게 내보이는 것 같아 부끄러웠나 봅니다. 
 
그래도 이곳은 사진사들에게 상당히 너그러운 곳입니다.
'우리같은 사람, 사진 찍어서 뭐 하능교?'하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할매들도 말문을 열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자신들의 영역 속으로 우리를 서스럼없이 끌어들였습니다. 볕 좋은 골목에서 고추를 말갛게 말리던 할매들이 그랬습니다. 6.25사변 때 황해도 곡산에서 피난내려와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는 한 할매는 피난시절에게 고생했던 경험담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했고, 또 다른 할매는 판자집으로 얼깃설깃 얽혀있던 태극마을의 원형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겨울마다 감천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 때문에 하꼬방같은 집들은 연신 들썩거렸고 긴 겨울을 모질게 추위와 싸워가며 버텨야 했다면서 웃음으로 그때의 고생담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내 기억의 시작이던 70년대 초입의 그 시절엔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그저 그런 가난과 추위 쯤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갔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병들고 늙어갔습니다.
한때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했던 이곳도, 도시의 급격한 팽창으로 인해 중심부로 편입되었습니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 낡고 오래된 중심 지역은 슬럼화와 공동화의 그늘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낡고 오래되어 흉물스럽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마을들은 도시재개발이라는 명목하게 힘없이 허물어져 갔고 그곳은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 아파트군들로 대체되었습니다. 도시외관은 규칙도 계획도 없이 파괴되고 일그러졌지만, 사람들은 안락과 편안함을 쫓는 것에만 급급했습니다.
 
돈없고 힘없는 자들의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땅...
어쩌면 우리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망각한 채, 단지 단순한 아름다움에 현혹당한 부나방처럼 이곳을 찾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곳에 가면 삶이 있고, 삶의 애환이 있고, 잊혀진 우리의 꿈이 있으며, 우리의 슬픈 역사가 여전히 숨쉬는데도 애써 외면하고 있지나 않은지 한번쯤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익숙한 이 골목을 배회할 때면 늘 조심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