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 포지타노 가는 길




 


 






 

그렇게 긴 회랑을 지났다.
아직 채 잠에서 깨지 않은 로마의 바람을 가르며 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던 결과다.
지난 밤, 비교적 숙면을 취한 탓에 몸은 개운해졌지만 여전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신열처럼 남아 있어서 새벽부터 잠을 설쳤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대부분의 민박집은 테르미니 역 주변에 위치해 있다.
여느 역 주변이 그렇듯이 접근성은 뛰어난 반면 오래되고 낙후된 지역이기 때문에 다소 슬림화되어 있다.
그래서 밤의 역주변 골목은 음험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하다. 낯선 시선, 낯선 그림자에도 움찔움찔 놀란다.
그 두려움이란 것이, 결국엔 낯선 곳에 첫발을 디뎠다는 이질감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아침의 햇살이 떠오를 때면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열정으로 무디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잔뜩 웅크렸던 어깨를 펼치고 낯선 도회의 거리를 돌아 그렇게 새로운 곳으로 떠날 채비가 완료됐다.
일상의 일탈로부터 스스로에게 부여한  '여행자'라는 칭호가 마치 훈장처럼 빛난다.



딱히 어딜 가야겠다는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지만 대충 머릿속에 담아온 오늘의 일정은 '나폴리'發 기차를 타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폴리에 도착해서, 소렌토와 포지타노, 시간여건만 허락한다면 아말피까지 내달려볼 참인데 여정은 내내 머릿속에만 맴돌고 있다.
무계획적이고 충동적으로 떠나는 눈부신 날의 이태리 남부여행.


로맨틱하게 들릴 진 모르겠지만,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했던 그때의 여행 궤적을 그대로 답보하는 셈이니
어떻게 보면 추억 여행인 셈이다.

단지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준비도 없이, 겁도 없이 성큼 떠나려 하는 지도 모른다.


서둘러 일찍 나오긴 했는데 역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폴리행 티켓을 끊어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티켓 창구를 찾는 게 예전만큼 쉽지 않다.
대신, 즐비한 자동판매기들이 그 자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사용법을 모르는 나로서는 갑자기 황당한 기분에 휩쓸리고 만다.

그야말로 머리속이 백짓장처럼 변해서 한참을 멍하니 우두커니 선 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 지 한참동안 지켜봐야 했다.
알고 나면 별 것도 아닌 것들도 모를 때는 마냥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게 인지상정인 모양이다.
영어 버튼을 눌러서 판매기가 지시하는 사항대로 하나하나 터치해보니 의외로 간단하고 편리하다.
그 작은 작동법을 알아낸다고 시간이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무사히 티켓을 끊었다는 것에 스스로 감탄하며 위안을 삼는다.
























































 

 

 

 

 


8시 27분발 나폴리행 IC.


비어있는 6인석 컴파트먼트를 혼자 독차지한 채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낯익은 이태리의 풍경을 지켜본다.
나트마한 둔덕들과 심심찮게 보이는 소나무 숲 때문에 한국의 풍경과 이태리의 그것은 참 많이 닮아있다.
이런 닮고 익숙함에 대한 이태리의 추억들이 그래서 더 정감있게 다가오는 지 모른다.


나름대로 지니고 있던 여행의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여기에 온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여행의 원칙이란 것은 가급적이면 유럽 쪽으로의 여행은 당분간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여행의 제반 시설이 너무 잘 갖춰진데다 편리하고 시스템적이라서 여행의 의외성과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게 첫번째 이유였다.
너무나 뻔하게도 이런 곳으로의 여행은 틀에 박힌 유적지 또는 관광지 일변도의 여행이 될 수밖에 없어서
그렇고 그런 유적지에서 누구나 다 찍는 화각대의 사진을 찍고 유사한 경험을 한다는 게 소름끼칠 정도로 싫었다.


색깔있는, 여행의 느낌보다는 각본 잘 짜여진 패키지 관광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관광'이 아닌 제대로 된 '여행'을 하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삐뚤어진 여행관이 무의식 속에 잠재된 탓인지  단지 시간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준비를 소홀히 했다.
여행은 아는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아는 게 없으니 결국 허울좋은 '추억'을 핑계삼아 나폴리 행 기차에 몸을 실고 있다.



몽골과 네팔여행을 기점으로 내 사진 성향이 점점 풍경landscape에서 인물portrait 쪽으로 전향해가고 있었다.
피상적일테지만 현지인들의 삶 속에 잠시라도 묻혀서 그 삶의 형태들을 내 카메라에 옮겨보고 싶었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6-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로서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그 녹록지 않은 힘겨운 삶들을
어설픈 과거의 회귀라는 명분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무작정 화려하고 가식적인 도식성만을 쫓던 성향이 어느새 잊혀졌던 흑백필름의 로망처럼 '의외성'과 '질퍽한 삶'이라는
명제에 이끌렸으리라.

쾌적하고 안락한 기차여행보다는 먼지 풀풀 날리는 황량한 길이라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그런 여행이 더 끌렸다.
그런 점에서 유럽이라는 곳은 내 적성상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망설였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스스로의 원칙을 무시하면서까지 이곳에 왔고 여행을 제대로 즐길 일만 남아있을 뿐이다.
혼자 다니기 때문에 그만큼의 자유야 누리겠지만,
자유로움이 온전하게 나를 충족시키진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과 불안감이 벌써부터 자리잡기 시작한다.



































































아무튼,  따뜻한 지중해의 햇살이 점령한 나폴리의 가리발디역으로의 입성은 각본대로 척척 진행되어간다.
난장판같은 역주변의 변하지 않은 풍경이 가뜩이나 않아도 주눅든 나를 더욱 긴장하게 한다.
이곳의 풍경은 6년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악다구니를 써가며 장사를 하고 있는 흑인 노점상들의 험악한 눈빛도 그랬고,
아무렇게나 헝클어 진 채 규칙없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어지러운 전선줄도 여전했고,
역전을 가득 매운 비둘기 떼들과 냄새나는 분비물도 그랬다.


어쨌든 불쾌한 추억들로 가득했던 나폴리로 다시 왔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무표정한 현대인들의 전형처럼 이내 나폴리 속으로 묻혀갔다.


민박집은 가르발디 광장 인근에 위치하기 때문에 사철 역사까지 가는 길은 아주 가깝다.
포지타노를 가기 위해서는 가르발디 역 주변의 사철역을 이용하여 소렌토로 갔다가 다시 시타버스를 갈아타면 된다.
소렌토로 가는 길에 폼페이가 있어서 잠시 내려서 들러도 되지만 유적지에 대한 감흥이 많이 반감된 탓에 그냥 스쳐가기로 했다.
소렌토를 생각하면 무엇보다 시큼한 레몬향이 가득한 그곳의 풍경의 노란 풍경이 떠오른다.

말간 볕에 잘 말라가던 빨랫감과 함께 가로수들마다 노란 레몬이 향기롭게 익어가던 그 기억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아내와 거닐던 사람없는 선착장과 우리를 쫓아오던 늑대같은 개 두 마리 그리고 그림처럼 환하게 펼쳐져 있던 해안절벽...


여전히 태양은 빛났고 우리를 실은 기차는 예전의 기억 속을 뚫고 가듯 소렌토로 향한다.
오 솔레미오라도 부르고 싶을 정도다.

껌을 건내자 배시시 웃으며 거절하던 아름다운 이태리 아가씨가 내리고서도 한참이나 더 달려야 겨우 도착한 소렌토..
한때 휑한 겨울바람만 지독하게 불어오던 그곳은 수많은 여행자들과 햇살들로 들끓는다.


박제된 추억을 허물고, 새롭게 시작된 소렌토에 대한 그림은 또다른 느낌으로 채색되어간다.
이제 갖 여름이 끝난 초가을이라 그런지 레몬은 설익어 초록빛을 띄고 있고 기억속에 남은 소렌토도 그렇게 낭만적인 않았지만,
어쨋든 그렇게 소렌토로 스며들어와 따뜻한 광합성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이곳을 다시 오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던가.
아내와 함께 오지 못한 것이 여전히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으로 가슴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내게는 오늘 만나 낯설지만 어느새 친숙해진 두 길동무가 있었고, 없던 목적지까지 생긴 탓에 다소 호기로웠다.


시타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언덕을 올랐다. 가려진 나무덩쿨 사이로 보이는 소렌토의 전경이 너무 예쁘다.
파란 하늘과 하늘 바다... 긴 해안절벽을 따라 발달한 소렌토의 낯익은 풍경으로 우리는 탄성을 지른다.
연신 카메라를 꺼내서 찍어보지만, 구불한 길을 이리저리 오르는 버스의 진동 때문에 쉽지 않다.


작은 버스에 탄 사람들은 시선을 차창으로 고정시킨 채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절벽 위에 빼곡히 채워진 마을이 다가설 듯 하면서도 이내 계곡에 휘감겨 사라진다.
물어보니 저곳이 포지타노라고 한다.










 

 

 

 

 

 

 

 

 

 

 

 

 

 

 

 

 

 

 

 

 

 

 

 

 

 

 

 

 

 

 








포지타노...
몇 겹의 해안계곡을 돌아 이태리 남부의 아름다운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소렌토에서 직선거리로 따졌을 경우엔 얼마 되지도 않을 것 같은데, 해안 도로를 따라 빙빙 둘러 오다보니 족히 1시간은 걸렸다.
사진으로 익히 봐왔던 친숙한 포지타노의 첫번째 정류장에서 무작정 내렸다.
회백색의 낮은 집들이 언덕을 가득 매우고 있는 포지타노는 부산의 어느 마을과 무척 닮아있다.
저 경사진 곳에 처음 터전을 잡고 삶을 꾸려갔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전이되어 온다


지금이야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유명한 관광지로써 그 댓가를 충분히 받으며  부를 누리고 있겠지만,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척박한 땅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얄궂은 생각...


작은 골목길을 따라 나선다.
예쁜 꽃들이 한웅큼씩 걸려있는 집들이 이어지고,
햇볕에 잘 말라가는 빨래들이 말간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고,
만나는 이태리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챠오'를 남발하며 낯선 여행객들을 반긴다.


같이 간 두 대학생들은 포지타노를 배경에 넣고 서로를 찍어 주기에 여념이 없다.
가끔 두 사람의 모습이 함께 담긴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지만 느린 걸음을 옮기며 이 마을의 정취만 담다 보니 그만 순간을 놓치고 만다.
잘 찍어서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보다는 내 눈으로 보인 이 아름다운 마을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심만 가득하다.
내 느낌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을 찍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나는 잘 안다.


사진은 때론 왜곡되고 편향적일 수밖에 없어서, 온전히 내 감정을 표현해 내기란 너무 힘들다.
따지고 보면 낮에 찍는 풍경사진이라는  것이 지극히 평면적일 수밖에 없다.
이차원적인 평면에는 그만큼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적다는 말과도 상통할 것이다.
이를테면, '달력사진'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작은 레스토랑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는다.
발음하기도 힘든 소스의 치킨요리와 저렴한 가격의 안심스테이크, 토마토 스파게티를 각기 주문하고,
저렴한 하우스와인 한 잔씩을 덤으로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