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언뜻 일어나서 바깥 하늘을 보니 동쪽 하늘에 불이 붙은 듯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삼각대를 들고 옥상으로 가볼까 망설이다 며칠동안 축적된 피곤 때문에 금새 포기하고 다시 침대에 눕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댓버선 바람으로 한달음에 부리나케 달려갔을텐데, 어느 듯 '일출사진'에 대한 욕심도 많이 수그러 들었다.
8시가 훌쩍 넘어서 일어나니 어느새 바깥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가면 갈수록 피곤이 누적되고 있었다.
머리를 누이면 바로 잠이 드는 것도 아니면서도 새벽같이 일어나 돌아다니다 보면 한겹한겹 피곤이 쌓이는 게 실감이 났다.
게다가 너무 강한 태양볕에 아무리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도 검게 타들어가는 얼굴빛은 어쩔 수 없었는데,
나중에는 화끈거리다 못한 못한 피부가 버짐처럼 껍데기가 하얗게 일어나기까지 했다.
며칠동안의 빡빡한 일정에 몸이 먼저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진 찍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힘에 부대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사진찍는 즐거움만큼은 여행에서의 오롯한 숙명처럼 다가왔다.
양꼬치 굽는 연기가 자욱한 시장통을 지나면, 낭(위구르인들의 주식인 빵)을 굽는 허름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의 초입이 나왔다.
어젯밤처럼 시끌벅적한 풍경은 아닐지라도 장사를 준비하는 그들의 분주한 몸놀림에서 삶의 보편적인 동질감이 느껴졌다.
비록 중국땅이라고는 하지만 우루무치에 비해 위구르인들의 비율이 많은 카쉬카르는 중앙아시아적인 색채가 상당히 강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위구르인들은 오랫동안 신장지역에 터전을 두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한나라 시대 카쉬카르는 서역(지금의 신강자치구) 36개국 중 소륵疎勒, 사차莎車등 여러 소국들이 위치한 곳이었다.
기원전 2세기부터 7세기까지 지배해 온 소륵국의 민족은 위구르인들이 아니라 인도유럽계통이었고
비단길을 건너온 불교를 받아들여 서역 최초의 불교국가가 되었다.
한 무제가 막강한 흉노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기원전 2세기경에는 서역국가들과의 공조를 모색하기 위해 파견한 장건이 이곳을 통과하였고
비록 대월지국 등 서역국가들과의 연합은 실패하였지만 이때 형성된 무역로가 동서양을 잇는 비단길의 시초가 되었다.
서기 73년 후한시대에는 강성해진 흉노가 무역로를 막고 돈황까지 위협을 하게 되자
이에 반초를 보내 서역원정을 감행함으로써 흉노의 서역도호부를 격파하였고 대월씨족이 한나라를 위협할 때는
다시 서역도호부를 재건시켜 서역을 평정시켰다(고 후한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한나라의 군대가 카쉬카르와 호탄을 침입하긴 했지만,
서역국가들을 완전하게 굴복시키진 못했고 그에 따라 여러 서역국가들은 자치권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었다.
중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서북공정의 일환으로 신강자치구에 대한 영유권을 한나라시대까지 올려놓았는데,
신장자치구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공고히 하려는 교묘한 의도에서 비롯된 역사왜곡일 수밖에 없다.
658년 당나라 군대가 이곳을 침범해서 소륵국을 멸망시키고 안서사진安西四鎭의 하나인 소륵진疎勒鎭을 설치하게 된다.
이때부터 중국의 직, 간접적인 지배가 시작된다고 하지만
1884년 만주족의 청나라에 의해 신강성이 설치될 때까지는 이곳에서의 중국의 지배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위구르인들이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들어온 것은 9세기 이후부터였다.
외몽골지역에 자리하고 있던 위구르제국이 붕괴되자 그 유민들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이미 이 지역에 정착해서 살고 있던 다른 투르크족과 연합하여 카라한 왕조(840-1240)를 세우고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바야흐로 투르크-이슬람 문화를 이 지역에 꽃피우게 된다.
카쉬카스는 카라한 왕조의 왕도로서 이른바 신장지역 이슬람문화의 전진기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어쨌든 카쉬카르는 소륵국때부터 실크로드 교역로의 중심지 역할을 독톡히 하는데,
중국에서 천산남로를 타고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비록 독자적인 소왕국으로 중계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구가하던 과거의 영화는 사라진데다,
이제는 중국의 끄트머리에 있는 변방의 작은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카쉬카르는 비단과 여러 상품들이 많이 거래되는 신강지역 최대 바자르(시장)로서의 기능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이렇듯 카쉬카르의 진정한 의미는 '시장(바자르)'이라는 말로 대변할 수 있다.
세월의 수많은 풍상에도 변하지 않던 바자르의 명성은 1960년 문화대혁명의 광풍으로 된서리를 맞게 된다.
자유로운 상업활동이 자본주의적인 병폐라고 역설하는 홍위병들에 의해 주변국간의 교역이 금지되면서 바자르는 황폐화되었고,
문화혁명의 광란이 끝난 1980년 초반에야 비로소 바자르가 다시 들어서기 시작했다.
다시 들어서기 시작한 바자르는 예전처럼 노천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곤 했던 비상설 바자르가 바로 그것.
1984년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이 점차 늘었나면서부터 바자르는 활성화되는데,
파키스탄과 연결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1986년 개통)가 뚫리면서 파키스탄 상인들이 왕래가 부쩍 잦아들었고,
구소련이 해체되고 대외개방이 가속화됨으로써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일요시장의 교역인원만도 20만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2004년 카쉬카르의 일요시장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바로 시정부에 의한 상설시장화가 그것이다.
바자르의 대명사처럼 불렸던 일요시장은 이로인해 전통적인 비상설 바자르로서의 역할을 종식하게 한다.
1주일에 한 번씩 열리던 비상설시장으로의 바자르는 물건을 사고 파는 단순한 공간일 뿐만 아니라,
소통과 화합 그리고 쉼터라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소로서 위구르인들에게 자리매김하던 곳이었다.
(위구르인들의 정체성이 고스란이 살아있는 시장들을 소멸시키기 위한 간교한 중국정부의 시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0년 우루무치와 연결되는 난장(南疆) 철도가 개통됨으로써 위구르인들의 위기감은 더해 갔다.
난장철도를 통해 중국 내지의 값싼 공산품 뿐만 아니라 자본력이 막강한 한족들의 유입도 더불어 이루어졌다.
빠른 속도로 진출한 한족들은 카쉬카르 시내의 상권을 독점하는 것은 물론이고, 관공서나 대기업 등의 일자리마저 다 차지하게 된다.
한족들의 경제적 횡포와 고용에 있어서의 민족적 차별로 인해 위구르인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멸시와 조롱, 중국 정부의 각종 불평등 정책에 힘입어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극에 다다른다.
거대한 중국땅에서 소수민족으로채 전락한 채 살아가야 하는 위구르인들의 고단하고 힘든 역사의 편린이 느껴졌다.
카쉬카르의 구시가지를 천천히 걸었다.
이곳은 예전부터 위그루인들이 살아왔던 삶의 터전으로 그들의 전통가옥과 도시 계획이 그대로 녹아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전통가옥은 짧게는 50~60년이지만 길게는 몇 백년이나 된 오래된 가옥들이 좁은 골목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구조로, 위구르인들의 오랜 지혜와 전통이 담겨있는 문화풍습이기도 하다.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와 지진에 취약한 가옥구조라는 이유 때문에 중국 정부는 불도저식으로 철거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성내에만 6개였던 촌락이 3개로 축소되었고 쫓겨난 위구르인들은 외곽에 건설된 엉성한 아파트 촌으로 밀려났다.
남아있는 구시가지도 계속해서 철거되고 있어서 낮시간에 방문하면 골목마다 철거공사로 인해 발생하는 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이는 위구르인들의 전통문화를 희석시키고 주민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신장지구의 지배력을 더욱 공고화하려는 의도라는 관측이 나돌고 있다.
일요일 아침에 찾아간 구시가지는 아직 깨어나지 않는 고요함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낭을 굽고 있는 빵가게에선 점원들의 손길은 분주했고 늘어놓은 양고기는 새벽부터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해 금새 동이 났다.
먼지 풀풀 날리게 빗질하는 아낙이 있는가 하면 우유장수에게 따뜻한 우유를 건내받는 아이도 눈에 띄였다.
이곳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일테지만,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만의 이국적인 풍경들이 그래서 독특하고 재미있는 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시선은 무덤덤할 수 밖에 없지만 조금 빗겨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새로운 감흥에 젖어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적이 끊긴 어두운 미로를 걷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색다른 기대감에 마음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미로처럼 얽혀있는 골목을 돌다보면 어느 곳에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함지막하게 들려왔다.
하나같이 맑은 눈빛으로 ‘할로’를 외치는 아이들, 손을 흔들어주거나 사진을 찍어주면 어느새 v자를 그리며 포즈를 취했다.
LCD를 보여주면 금새 넘어질 듯 까르르거리며 웃는 웃음소리가 긴장한 이방인의 가슴을 열게 했다.
구시가지의 골목은 사람들의 오랜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낡고 오래되어 지저분할 것이라는 선입견은 이내 벗어 던져야 했다. 의외로 골목 안은 정갈하고 깔끔했다.
가끔씩 어두운 골목을 걷는 사람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스피드가 나오지 않아 흔들린 사진이 찍히곤 했지만 느낌을 담는 것이니만큼 구애받지 않았다.
이곳에 사는 위구르인들은 사진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
눈빛으로 인사를 나누면서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는 제스츄어를 보이거나,
사진을 먼저 찍고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하면 상대편도 답례로 미소를 보내왔다.
어디에서나, 누구나 그랬다.
새벽 일찍 문을 여는 빵집에 들렀을 때도 그랬고, 양고기가 늘려있는 정육점의 영감님도 그랬다.
지나가는 아이들의 사진을 찍을 때도, 우유를 파는 아저씨의 모습을 담을 때도 그랬다.
이곳에선 오래 전 잃어버린 과거의 추억이, 상실해버린 감성이 그대로 살아나는 공간이었다.
집들의 문고리마다 세월의 흔적이 자욱하게 배긴 것처럼 손때로 인해 색깔은 거무틱틱했지만,
오히려 그런 느낌이 더 정감이 있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던 곳...
미로처럼 얽혀있는 카쉬카르의 구시가에서 느낀 건 사람사는 냄새가 그래서 그립다는 게 아닐까.
세노베르도, 아자고리도 언젠가 그리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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